<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0-45
그때에 40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1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42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43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44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45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치유하십니다. 이스라엘에서 나병을 비롯한 악성 피부병에 걸린 이들은 사제로부터 부정한 이로 선언되었고, 다시 건강해져 사제로부터 건강한 이로 판명된 뒤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치유되었음을 인정받을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고 동네 밖에서 따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은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라고 외쳐 다른 사람들과 격리된 사람임을 표시해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환자가 아니라 죄인으로 여겨졌기에 육체적 고통만큼 심리적인 소외가 그들을 힘들게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치유를 청하는 나병 환자의 처지가 무척이나 절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감각이 마비되고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육체적 고통보다 사람들에게 눈총 받고 소외당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병든 몸과 닫힌 마음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또한 지나간 시간들 가운데 상처로 썩어 문드러지고 떨어져 나간, 말하지 못하고 숨기고 있던 아픈 마음이 있다면 주님께 내보이며,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태 8,2).
주님께서는 당신 손을 내미시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정성을 다하여 오늘 예물 기도처럼 기도합시다. “주님, 주님의 백성이 드리는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소서.”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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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받기 전보다 받은 후가 더 중요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큰 믿음을 보이고 병을 치유받아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지만, 결국엔 예수님께 불순종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그가 널리 퍼뜨리고 다녀서 예수님은 더는 다른 고을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실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의 복음이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에는 나병 환자가 그 이야기를 퍼뜨렸는지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루카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 이야기가 저절로 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만 유독 치유된 나병 환자 때문에 복음 전파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 사가가 불순종이 교회를 얼마나 분열시키고 복음 전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특별히 지적하고 싶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제 말씀드렸던 것처럼 모두가 그리스도를 찾으면 사실 옳고 그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도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싸움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예수님보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그분의 뜻에 불순종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도 좋은 의도로 이 사실을 알렸겠지만, 사실 예수님의 명령보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이런 교만은 마치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악령이 다시 들어온 것처럼 큰 해악을 끼칩니다. 그러면 그의 운은 거기까지입니다.
신학교에서 모든 신학생의 소원은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생들은 더 나아가 ‘멋진 사제가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나 무엇이 멋진 사제인지는 잘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수업을 하다가 신자들이 가장 바라는 사제 상을 말해보라고 하면 ‘강론 잘하는 사제’, ‘인사 잘하는 사제’, ‘신자들과 잘 어울리는 사제’ 등을 대답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1, 2위는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조사에서 신자들이 바라는 사제상을 조사했는데, 2위는 ‘기도하는 사제’였고, 1위는 ‘겸손한 사제’였습니다. 아마 신자분들은 당연하다고 하시겠지만, 막상 신학생들에게 물어보면 이 두 가지는 대답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저도 ‘강론 잘하는 사제가 제일 인기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다가 이것을 보고 조금은 충격이어서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은총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은총을 받으면 교만이 커져 순종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되는 인물이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위해서라도 은총을 청할 때보다 은총을 받고 난 후의 자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실 것 같습니다. 선물을 주어서 그 사람 상태가 더 나빠지면 안 되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은총을 얻기 위해 지금의 상태를 주님께 청하는 것보다 그것을 받고 난 후의 자세를 청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어떻게 1위를 그렇게 오래 하시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유재석 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마는 그런 거 같습니다. 정말 하루하루 맡겨진 일을 하기에도 바빴습니다. 사실 뭐 제가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개그맨으로서 울렁증에 여러 가지 콤플렉스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뭐 그리 설득력 있는 대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다 그는 문득 20년도 더 전에 무명시절 때 절실하게 매일 바치던 기도 내용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어서 말했습니다.
“제가 워낙 예전부터 참 많이 기도했어요. 자기 전에. 방송이 너무 안 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그랬을 때 매번 정말 간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진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정말 한 번만, 진짜 딱 한 번만 저에게 개그맨으로서 기회를 주신다면, 나중에 소원이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얻은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생각한다면, 정말 그때는 정말 엄청난 이 세상의 어떤 고통보다도 큰 아픔을 나에게 주신다고 해도 저는 ‘저한테 왜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나요?’라는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겠다.”고요
이런 기도를 드린 이유는 이것입니다.
“주변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스타가 되고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느낀 점은 정말 뜨고 나서 변했다는 사람은 되지 말자. 항상 겸손하고, 항상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노력하고, 솔직하고, 성실한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유재석 씨가 이렇게 오랫동안 1위 자리를 지키는 것은 그가 무명시절부터 기도했던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명 때 뜨기만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그는 뜨고 나서도 겸손하겠다는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도 무언가 청할 때 지금 부족한 것을 하소연하는 것보다는 받고 나서 더 겸손하겠다는 결의를 말씀드리는 것이 은총을 받기에 더 나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떠한 은총을 청할 때 더 겸손해지고 더 기도하겠다는 결심이면 못 받아낼 은총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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