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2021.1.8.)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루카 5,12-16 )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2021.1.8.)

by honephil 2021. 1. 8.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2-16
12 예수님께서 어느 한 고을에 계실 때, 온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렇게 청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나병이 가셨다.
14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에게 분부하시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셨다.
15 그래도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 퍼져,
많은 군중이 말씀도 듣고 병도 고치려고 모여 왔다.
1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나병 환자의 청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시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오늘 복음은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이의 요청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장면입니다. 절박한 심정의 사람은 무엇이든 적당히 하거나 대충대충 넘기지 않으며, 간절함을 담아 진실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그대로 다른 이에게 전달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이야기뿐 아니라 치유를 바라는 많은 이들의 절박함을 네 권의 복음서는 담백하게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다시는 오지 않을 유일한 기회이기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체면을 차릴 생각도 없이 길가에서 소리 높여 주님께 외치기도 하고(마르 10,46-48 참조), 많은 군중 속에서도 주님을 찾아 그분의 옷에 손을 대기도 하며(마르 5,21-34 참조), 믿음이 없음을 고백하며 염치없이 악령에 시달리는 자신의 아이를 낫게 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마르 9,14-29 참조).


이렇게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곧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뜻이며,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우는 우리의 생각이 아닌,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의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쉽게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 불가능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

 

<개의 자유, 늑대의 자유>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를 치유해주시는 내용입니다. 나병 환자는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하고자 하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밖에 안 계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하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굳이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까요? ‘자유’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에게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십니다. 마치 율법을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병에 걸린 것이라는 느낌까지 줍니다.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대로 네가 깨끗해진 것에 대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리고 당신도 좀처럼 자유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처럼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많은 군중이 몰려듦에도 “외딴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고 나옵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만나 그분의 뜻에 나를 봉헌하는 시간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율법에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나병이 나으면 율법에 매이게 됩니다. 무엇이 더 자유일까요? 율법에 매이는 것이 더 자유 아닐까요? 사실 사람은 나병에 걸려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던지, 율법에 매여 나병으로부터 자유롭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몹시 굶주려 뼈와 가죽만 앙상하게 남은 늑대가 어느 날 숲속에서 반지르르 윤이 나고 살이 토실토실한 개를 만났습니다.

 

늑대: 넌 참 행복해 보이는구나!

 

개: 나랑 같이 가자. 너도 나처럼 될 수 있어. 너를 좀 봐. 너무 볼품없고 비참해. 그렇게 있다간 굶어 죽고 말 거야.

 

늑대: 널 따라가면 난 뭘 해야 하는데?

 

개: 별거 없어. 가끔 사냥도 나가고, 집에서는 주인한테 잘 보이기만 하면 돼. 그러면 주인이 귀여워해 주고 맛있는 음식도 갖다 주지.

 

늑대: (기쁜 마음으로 개를 따라가다 문득 개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보며) 그게 뭐야?

 

개: 이거? 아, 주인이 있다는 뜻의 목걸이야.

 

늑대: 목걸이! 그럼 넌 마음대로 다니지 못한다는 말이니?

 

개: 늘 그런 건 아냐. 가끔은 주인이 끄는 대로 가야 해. 대신 맛있는 음식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잖아.

 

늑대: 그렇지 않아, 나한테는 자유가 무척 중요해. 아무리 맛있는 진수성찬을 준다고 해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자유와 바꿀 수 없어.

 

      여러분은 개와 늑대 중에 어떤 것이 더 자유롭게 보이나요? 좀 고생스럽더라도 자신의 자유로 사냥을 해서 배를 채우는 늑대의 삶이 더 좋아 보이나요, 아니면 그런 것은 신경 안 써도 되지만 주인의 목줄을 걸고 다니는 개가 더 좋아 보이나요? 사실 늑대라고 목줄이 없을까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그 나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약해 보이면 안 되고 내가 누군가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으면 나의 배를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늑대의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나병 환자입니다. 몸은 자유로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만신창이가 된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에 매여 있어 부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세상의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개는 배고픔의 욕망을 좇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 밥을 주시는 분에게는 순종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보니 국정농단과 관련하여 삼성 이재용 회장이 법정에서 울먹였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검찰이 ‘징역 9년’을 구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재용 회장은 아버지보다 나은 삼성을 만들겠다며 선처를 호소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돈이 가장 많아도 이렇게 마음이 힘든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면서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진정 자유로워지고 싶었다면 법을 지켰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 않아도 사람은 반드시 어떤 법에는 지배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유라 여깁니다. 국정농단 때 이재용 회장은 왜 뇌물을 바쳐야만 했을까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나의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만약 살을 빼야겠다고 결정하면 살이 빠질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려면 반드시 자신 안에 그와 반대되는 욕구가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먹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 욕구는 배고플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음식을 더 먹게 만듭니다. 인간은 이렇듯 욕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나병과 같이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면 차라리 목줄을 채우고라도 편안함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목줄을 채우는 시간입니다. 이 목줄을 채우면 세상 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느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1837년 노예제도 폐지를 원했던 링컨은 정부에서 ‘노예제도 폐지론자 규탄안’이 통과된 것을 보며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다 상대 후보인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에게 선거에서 패했습니다.

 

      아마 링컨이 권력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면 대통령이 되기 위해 자기 소신을 버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위해 명예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1860년, 링컨은 더글러스 의원과 다시 겨루었고 드디어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마침내 노예 해방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흑인 중 어떤 사람이 링컨 앞에 무릎을 꿇더니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링컨은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습니다.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만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만 영광을 돌리세요.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법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참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자유는 자아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누리게 됩니다.

 

      나병 환자가 나병에서 벗어나 율법의 자녀가 되는 것이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아버지의 자녀로 기도하러 외딴곳으로 향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같은 자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또 누군가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사랑의 법을 장착합시다. 그러면 이전의 자아와 세상의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https://youtu.be/Fns232eqmq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곧 그의 나병이 가셨다. ( 루카  5,12-16  )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금요일 (2021.1.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