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현 대축일을 1월 7일이나 8일에 오는 주일로 옮겨 지내는 곳에서는, 주님 세례 축일은 바로 다음 월요일에 지낸다. 이때 신경은 바치지 않는다.
‘주님 세례 축일’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주님의 세례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 공현 대축일과 깊은 관련이 있다. 전례력으로는 이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다음 날부터 연중 시기가 시작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
그때에 요한은 7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9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느님이시다.’라고 우리 신앙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마주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와 늘 함께 있는 보호자처럼 그분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십니다. 성자의 강생은 나약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놓으시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세례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동참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심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세례가 하느님과 만나는 문이라면,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면,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세례는, 이 세상을 구하러 오신 성자께서 성부와 늘 함께하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나약한 우리에게 드러내어 보이신 것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어린아이의 모습을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셨듯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늘 함께 계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세례는 영광이고, 예수님께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하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성부께 순종하시고 예언을 성취하시고자 택하신 겸손의 표양입니다. 성부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간인 우리도 주님의 세례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의 하느님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내 삶의 중심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놓는 것처럼, 세례를 받은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고 마쳐야 합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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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반항은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신호>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날입니다. 30년간의 사람의 아들로 사는 삶을 마감하고 3년간의 하느님 아들로 사는 삶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해주듯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여기서 “너는”이라는 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직접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심을 ‘인정’ 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너를 낳았다”라는 뜻입니다.
왜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서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그런 인정을 받으셔야 했을까요? 인간의 성장 과정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신을 따라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인간이 아는 것은 당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기 이전의 상태를 인간 성장 과정에 빗대어보면 ‘사춘기’입니다. 많든 적든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는 때가 있습니다. 요즘은 초등학교 4~5학년이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부모에게 대한 반항입니다. 사실 부모가 너무 잘난 사람이라면 자녀는 더 큰 사춘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사실 자퇴지만 퇴학 이틀 전에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어쩔 수 없이 자퇴한 것입니다. 아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스트레스가 컸던 것입니다. 5년 동안 엄마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아이도 그래서 지옥과 같은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대한민국 최고의 강사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 아들인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니 열등감과 무기력감에 피시방만 전전하는 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입시학원에 다니다가 갑자기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고 싶어 해서 기뻤지만, 입시 석 달 남겨놓고 예대를 가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엄마는 웃겨서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뭔가 하려고 하니까 시켜주었는데 아이는 음악성이 있는지 악보도 못 보면서 한 곡을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고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다가 들어온 학생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 년을 겨우 버티다 또 자퇴하였습니다.
무기력증에 시달리다 엄마가 믿어주는 것에 죄송했는지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성당에 다니게 되었고 다시 노력해서 음대에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왜 태어났는지 성당을 다니며 알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때부터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 연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는 모르지만 아마도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미경 강사는 사춘기를 길게 앓고 있는 아들이 자신에게 계속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들렸다고 말합니다.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흔히들 ‘사춘기에 맞는 부모의 대화법’이란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춘기는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왜 태어났는지 가장 처음에 묻는 때가 언제일까요? 아기가 태어났을 때입니다. 물론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아기는 그저 불안해서 울기만 합니다. 다행히도 왜 태어났는지에 대한 문제는 엄마가 금방 해결해 줍니다. 젖을 줌으로써 자신이 엄마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는 엄마 품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엄마, 아빠처럼 되면 됩니다.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민이 다시 시작되는 때가 사춘기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사춘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굳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무기력하고 고립되는 시기가 성장에서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창조론에서는 이 시기가 참 부모를 찾으라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춘기가 없다면 하느님을 굳이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 때 참으로 세례를 체험해야 합니다. 이때 부모가 자신이 부모임을 강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자녀다”라고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춘기가 되면 자신들도 아기를 낳을 수 있음을 알게 되며 더는 부모를 믿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아기의 모든 문제가 부모를 만나면서 해결되었던 것처럼 사춘기 때의 모든 문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해결됩니다. 하느님만이 다시 생명을 주시고 몸을 만들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부모처럼 되려고 하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지듯이,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처럼 되려는 것으로 모든 고민이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기 시작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바로 시작하신 두 가지는 ‘자기 자신과 싸움’과 ‘아버지 뜻의 실현’입니다. 성령은 마치 어머니가 아기에게 자신이 부모임을 믿으라고 주는 젖과 같습니다. 우리는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며 당신 생명을 양식으로 주시는 그분을 우리의 참 부모로 확신합니다.
저도 사춘기를 극복한 것은 아마도 ‘나는 누구인가?’를 넘어선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에 대한 어쩌면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때 자주 하던 말이 “외롭다, 외롭다!”였습니다. 한 개신교 친구가 “너 성당 다니잖아. 예수님이 옆에 계시는데 뭐가 외로워?”라고 했을 때 저는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혼자 학교에서 돌아오는데 정말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졌고 그 이후로 사춘기의 반항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는 하느님을 찾으라는 신호였던 것입니다.
요즘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첫영성체와 세례가 진정으로 우리 삶에 스며들어 우리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고 특별히 자녀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고 그래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히 하느님처럼 되려는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합시다. 사춘기는 진화론이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진화론적으로 해결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께 자녀임을 인정받도록 주님께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 세례의 의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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