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마르코가 6,45-52)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2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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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마르코가 6,45-52)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2021.1.6.)

by honephil 2021. 1. 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우리가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오신 주님을 잊고 사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의 연약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마음이 연약한 것은 오늘 독서에서 말하는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는 삶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세상에 빠져 살게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예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제자들은 호수 위에서 또 다른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굶주림’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놓인 이들에게 희망으로 풍족하게 채워 주신 주님을 제자들은 그새 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제자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자신들의 지식만으로 판단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두려움으로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하여 제자들의 마음에도, 그리고 그들이 타고 있는 배에도 평화를 선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뵌 제자들은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죄책감을 떨쳐 냅니다. 우리의 주님,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현존은 또다시 우리에게 용기를 줍니다. 삶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의 주님이 되십니다.


우리 현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 곁을 떠나 현실의 여정을 걸어간다면, 곧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길은 두려움과 불안함뿐임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깊이 깨달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청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용기이며, 사랑의 행동입니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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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산다는 것 = 지옥에 산다는 것>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군중을 돌려보내시기 위해 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밤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밤새 호수 위에서 풍랑에 시달렸습니다. 새벽녘에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생각하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 배에 오르십니다. 그러자 바람이 멎고 평화가 찾아옵니다. 복음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마르코 복음 사가가 독자들을 이끌고 가려는 곳이 ‘탈출기’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일단 ‘광야에서 빵을 먹이신 기적’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백성’과 같습니다. 그리고 홀로 산에 오르셨다는 것은 홀로 산에 올라 하느님의 법을 지니고 내려오신 ‘모세’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왔는데 하느님의 이름은 ‘나’(있는 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라고 하실 때 하느님의 이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물 위를 걸은 것은 물 때문에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물을 갈라 탈출시킨 모세의 능력을 기억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빵을 먹으면서, 혹은 하늘에서 오는 양식은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여전히 자기 자신의 ‘나’라는 배에 타서 고생하는 이들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란 결론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유튜브 동영상 중의 하나는 어떤 교수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주제의 강의였습니다. 조회수가 거의 150만이 되는 것을 보고 더 놀랐습니다. 정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용을 들어보니 역시 우려했던 대로였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나의 주인은 나이고, 나의 존엄성을 누구도 건들지 못하게 하라’입니다. 타인의 의견이나, 책에 쓰인 이론들, 혹은 타인의 욕망에 아이 때처럼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적인 ‘나’로 살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이 어떤 의견을 자신에게 제시하면 술맛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나도 충고하지 않으니 타인도 자신에게 충고 같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제나라 임금 ‘환공’과 수레바퀴 장인 ‘윤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환공이 성인들의 책을 읽을 때 윤편은 그 책을 쓴 성인들이 이미 죽었다면 그 책을 읽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술 찌꺼기처럼 진짜 술도 아니며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윤편은 자신이 수레바퀴를 깎는데 그 기술은 글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타자의 이론은 그 자신이 지닌 체험을 바탕으로 성립된 주체적인 자아의 존엄성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를 두고, 자기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나의 존엄한 자기를 찾으면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로 새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결국은 나 자신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로 산다는 것이 참 행복일까요? 지옥입니다. 아기는 왜 울면서 태어날까요? 울어야 호흡이 시작되고 그래야 뇌와 온몸에 산소가 공급되어 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웃어도 우는 것만큼이나 산소가 공급되지 않을까요? 아기가 태어나서 우는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나’로 살게 되었을 때의 고통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부자유스럽고 고통스러웠던 때를 생각해봅시다.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일까요? 그때 가장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나라는 주체로 살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니 이제 나로 살아야 합니다. 불안해서 울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다시 ‘나’라는 자리를 부모에게 줍니다. 그러면 다시 편안해집니다. 엄마 품에서 아기는 울음을 멈춥니다. 아기는 그때 부모에게 억압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억압받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은인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다시 ‘나’가 고개를 드는 때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때입니다. 바로 사춘기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사춘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자신도 부모가 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때 아이들이 자유롭고 행복합니까? 부모가 볼 때는 자아에 사로잡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이것이 부모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녔던 ‘완고함’입니다. ‘나’라는 자아를 믿고 의지하며 그 지배에서 끝까지 벗어나지 않으려는 완고함입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이 ‘나’란 주님의 이름을 지닌 참 부모가 주는 양식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물 위를 걸으며 자아로부터 자유롭게 되려거든 당신을 주인으로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자아가 일으키는 모든 풍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분 뜻에 휩쓸려야 합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새로운 ‘나’가 됩니다. 그리스도가 ‘나’가 되니, 나는 곧 그리스도가 됩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 작지만, 또한 큰 신앙 체험을 하신 어떤 자매님이 저에게 보내오신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우선 하느님께,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신부님을 통해서 십일조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알려주셔서 하느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는 큰 은총 주심에 감사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줄었던 수입을 생각지도 않았던 곳을 통해 한꺼번에 채워주셔서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큰 기적은 제가 평생 몸이 매우 아팠고 불안과 두려움에 힘든 삶을 살았고 영적, 육체적으로 아픈 가족들로 인해 암 수술을 받았고 우울증, 공황장애 등을 겪고 있었는데 치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부님 많은 강론 계속 보면서 용기 내며 살아왔지만, 마음의 두려움과 공포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죽었다, 나는 하느님이다’ 하시는 말씀을 듣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특히 한밤중에 두려움이 덮쳐 숨쉬기가 힘들 때면 수도 없이 되뇌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었으니 다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곤 제 온몸의 기운이 빠지더니 경직이 되었던 몸이 풀리면서 무서운 공포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동안 별별 기도, 수 없는 미사, 안수기도, 병원 치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벗어나기 어려웠고 체력이 떨어지니까 더 견디기 힘들었던 수많은 고통 속에서 주님께서 신부님 말씀을 통해 치유해 주시고 살려 주셨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아픈 저보다 먼저 죽을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기도 안에서 제가 먼저 죽었고 또 죽으려고 하니 오히려 저를 힘들게 했던 가족들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나는 죽었다, 난 주님이다, 난 사랑이다’ 기도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드리며, 신부님 좋은 말씀, 십일조 계속 강조해 주셔서 저처럼 힘든 영혼들 다시 살게 해 주시길 기도드리며 주님께서 신부님과 함께 해 주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부모가 창조했기에 부모에게 ‘나’를 봉헌할 때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웠던 때처럼, 하느님이 창조하셨기에 하느님께 ‘나’를 봉헌할 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전에 섬기는 ‘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섬기는 피조물에 불과한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우상이란 뜻입니다. 절대 나를 믿거나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주님으로 내 안에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가장 큰 적입니다.

 

그리고 나를 지옥의 삶으로 살게 만드는 장본인입니다. 나로 산다는 것, 이것이 곧 지옥의 삶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구해주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자아라는 풍랑에 시달리는 우리 배 밖에서 물 위를 걸어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https://youtu.be/NAZHZkRbqT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6,45-52 ) -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2021.1.6.)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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