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20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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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2020.9.22.)

by honephil 2020. 9. 23.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져 있는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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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도 사랑할 때처럼>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쳐주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엔 가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걱정은 성령의 힘을 약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단 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만 머물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해보겠다고 했다가 이도 저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도 사랑이라면 넓게 하는 것보다 좁고 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돌 들고 싸우는 사람 수십 명을 만드는 것보다 총 든 군인 한 명 훈련하는 게 낫습니다. 성인 한 사람은 많은 사람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사도를 거부한다면 보이는 증거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사실 당신은 발의 먼지와도 같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먼지 털어버리듯이 매몰차게 떠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렇게 떠날 수 없다면 사랑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만약 두 연인이 헤어졌다고 합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술만 먹으면 계속 기억이 난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좀처럼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둘이 사랑할 때 누가 더 사랑했었다고 생각이 되나요? 당연히 매몰차게 끊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했기에 그만큼 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왜 인간이 지옥에 가게 내버려 두시는지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거부한다면 하느님은 더는 그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제 생각이지만, 만약 누군가와 헤어졌는데 그 누군가를 아직도 기억하며 잊지 못하고 있다면 그때 그 사람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할 때의 자세와 헤어질 때의 태도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골든 에이지’(2007)는 무적함대를 지닌 당대 최고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영국으로 망명해 있던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제거하려 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위험을 잘 알고 있던 대신들은 여왕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말렸지만 여왕은 국민들과의 소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왕이 지나가던 때 한 남자가 웅덩이가 있다며 그 위에 자기 옷을 던집니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남자였습니다. 여왕은 그 남자에게서 호감을 느낍니다. 그는 스페인 해적이라 불리는 라일리 경이었습니다. 그가 여왕의 침실에 드나든다는 소문까지 퍼집니다. 하지만 여왕은 그 사람만은 곁에 두려 합니다.

 

      이 와중에 메리 스튜어트가 여왕을 암살하려 한 것을 알고 그녀를 사형에 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제 스페인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두고 엘리자베스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랑을 라일리 경과 나눕니다. 영국 여왕으로서 자신 나라를 침공하려는 나라의 한 선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또 다른 궁실 여인과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자베스의 친구이자 하녀였습니다.

배신당한 사실을 알지만, 전쟁이 코앞이라 슬퍼할 여유도 없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죄수들까지 동원하여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친구와 라일리 경을 용서합니다. 둘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 이후 얼굴에 흰 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나섭니다. 흰 분을 발랐다는 것은 자신은 이제 세상에서 죽은 사람과 같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며 유일하게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을 한 번도 보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때가 영국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입니다. 무려 40년 동안 영국은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대국이 됩니다.

엘리자베스는 죽기 직전 숨을 거두며 자신이 평생을 사랑했던 한 남자, 자신의 친구에게 빼앗기 한 남자, 라일리의 이름을 부르며 생을 마감합니다. 여왕으로서 그 남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더 큰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습니다. 그것과 반대되는 애정에 휩쓸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 남자와의 애정에 휩쓸렸다면 나라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이도 애정에 휩쓸리기보다는 발에 먼지를 털어내듯 복음을 거부하는 이를 떠나야 합니다.

 

      어떤 때는 모질게 끊는 것이 사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개중에 몇 명은 그 사람이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좋은 것을 주려고 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아픔이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잃어봐야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발에 먼지를 털어내는 것은 헤어지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만약 그렇게 단호하게 끊지 못하면 그 사람은 끝까지 자신이 옳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모든 것을 내어놓아야 하고 헤어질 때도 그래야 합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https://youtu.be/UrEA1O8qBBQ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9.23.)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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