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9-21
그때에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이른바 예수님의 새 가족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고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그 형제들을 외면하시는 예수님의 차가운 태도로 오늘 복음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마치 거사를 앞두고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떠나는 영웅으로 여기지는 말아야지요. 요컨대 예수님의 새 가족은, 혈연이라는 굳건한 장벽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이를 형제요 자매라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루카 복음에서 성모님 또한 말씀을 듣고 간직하실 줄 아는 이로 제시되십니다(루카 1,45; 11,28 참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분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중요한 것은 들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과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상하여 잠 못 이룬 적도 있고, 스치듯 지나간 누군가의 말에 감동받아 평생을 두고 곱씹으면서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말 자체의 무게감만이 아니라 말하는 이와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은 서로의 관계를 위한 도구입니다. 말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하고 있는지, 나 자신 안으로 파고들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서로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상대를 참 피곤하게 합니다. 실컷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아 예수님과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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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께서 매정하게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실까요?
가족은 정말 지긋지긋하지만 버릴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관계일 수 있습니다. 가장 많이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가장 많이 사랑을 받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가족인데도 만나면 서먹할 수도 있습니다. 가족을 보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더 외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가족을 만나면 외롭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의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서먹하고 외로우셨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기쁘셨을까요?
먼저 사람이 왜 외로워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어머니가 창녀였습니다. 그나마 안데르센을 잉태하고 결혼했지만, 그마저도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아버지는 자살하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다면 자녀는 올바로 클 수 없습니다. 마를린 먼로를 보면 압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고아원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사랑을 그토록 원했지만, 사랑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 때, 그것이 자신이 찾던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고는 약물중독으로 사망합니다.
반면 안데르센은 어떻게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 그 많은 명저를 남길 수 있었을까요? 미운 오리 새끼가 외로웠을 때는 자신이 오리인 줄 알았을 때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백조임을 알고 백조 무리에 있을 때는 행복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백조가 오리 무리에서 자라면 왠지 오리 부모가 시키는 것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그러면 서먹해지는 것입니다. 가족과 있어도 외롭습니다.
사춘기 이전 아이들이 외로워 보이나요? 일반 가정이라면 외로움은 사춘기 때 시작됩니다. 사춘기 이후 부모가 더는 아이의 주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몰입하지 못할 때 느낍니다.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 외롭나요? 외롭지 않습니다. 몰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몰입하고 있으면 내가 외롭다고 말해 줄 자아가 그 말을 할 기회를 잃습니다.
사춘기 이전 자녀들은 부모의 뜻에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부모가 더는 그 역할을 해 주지 못합니다. 그럼 누가 해 줘야 할까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그 사람에게 순종하면 외롭지 않나요? 이제 머리가 커서 웬만한 사람에게는 순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순종하여 그 사람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일에 몰두할 때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실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이 되시어 당신 뜻에 순종하여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족은 피를 나눈 공동체입니다. ‘피’ 안에는 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뜻’도 들어있습니다. 부모의 뜻은 자녀들이 어릴 때까지만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끈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피입니다. 하느님의 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인간의 피는 유한하지만, 하느님의 피는 무한한 결속력을 지닙니다. 그 피가 성령이시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족 안에 들어오시면 그 가족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영원한 결속력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가족이 그래서 끝까지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가정에 성령께서 오시면 그 가족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하느님 뜻이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신 분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골고타까지 아무 말 없이 따라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니 외롭지도 않고 그래서 서먹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핏줄이라는 끊어지기 쉬운 줄을 놓고 하느님의 핏줄이라는 끊어질 수 없는 끈으로 우리 가족을 묶읍시다. 하느님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은 외로움을 모르고, 그러한 가정은 끊어질 수 없는 결속력으로 행복한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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