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전통적으로 마태오 복음의 저자를 세리 마태오로 여겼지만 학자들의 의견은 다릅니다. 여기서는 주석학 논쟁을 언급하기보다 교회가 왜 세리 마태오를 마태오 복음의 저자로 여겼는지에 주목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민족의 배신자이자 하느님을 등진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복음서 저자로 여긴 초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이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습니다. 초세기 신앙인이라고 우리와 다를 것이 있었겠습니까. 초세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의심하고 주저한 흔적은 복음서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따르지 않고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이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예수님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회적 약자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신 모습이 복음서에 숱하게 등장하지요. 쉽게 생각하고 지나칠 장면이 아님에도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그 장면들을 읽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술 한잔 나누는 이가 있다면, 그가 재림하신 예수님이시라면, 우리는 아마도 예수님을 비난하고 경고하고 훈계하며 급기야 쫓아내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이에게 의사로 오셨습니다. 제 잘못으로 아프든 타인의 차별과 억압으로 아프든, 아픈 이가 있으면 일단 고쳐 놓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터지고, 그로 말미암아 상처 받은 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함부로 내뱉는 비난의 말들이 아픈 상처를 더 후벼 파는 죄인들의 무지함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알면 얼마나 알고 정의로우면 얼마나 정의롭겠습니까. 참된 지혜이시고 참된 공정을 펼쳐 보이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죄인 마태오와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만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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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 제물이 자비의 열매를 맺으려면>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부자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마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것 같습니다. 그곳에는 역시 많은 세리와 죄인도 함께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람 같았으면, “나를 뭐로 알고 매국노들과 창녀들과 함께 식사하라고 하느냐?”라며 따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안에서 행복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바리사이들이 나타나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가까이하는 사람도 죄인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물들지 않는 분이심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하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병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사가 병자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시는데 “희생 제물”이 등장할까요?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바치고 계셨을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의 의무였습니다. 이 희생 제물의 가장 초기 모델은 역시 ‘선악과’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처럼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결과로 자신의 죄를 이웃에게 떠넘기고 이웃을 심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기에 이웃을 향한 자비를 잃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희생 제물을 바치면서도 자비심이 전혀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특별해지기 위해 바쳤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바치라는 이유는 하느님이 아니시면 누구라도 특별할 수 없음을 배우고 되새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며 더 특별해지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이 마치 카인처럼 제물을 바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겨서 더 특별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의 목적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이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세상에서도 가장 비천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갓 오브 이집트’(2016)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이집트의 신들과 인간들이 공존합니다. 이집트를 다스리는 왕들인 신들이고 백성들은 인간들입니다. 신들은 인간들보다 몇 배나 몸집이 더 크고 보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싸울 때 변신하면 무시무시한 모습이 됩니다.
이집트 임금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자리에서 그의 삼촌이 와 현 임금인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의 자리를 물려받는 조카의 두 눈을 빼어버립니다. 그런데 한 좀도둑이 보물이 있는 곳에 잠입하여 눈 하나를 훔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의 여자 친구가 화살에 맞아 죽습니다. 그 좀도둑은 그 눈의 주인인 신에게 가서 자신이 눈을 하나 돌려줄 테니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두 눈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신은 어디 파리 같은 게 와서 자신을 놀리냐며 그 좀도둑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좀도둑은 워낙 민첩한 데다 자신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결국에는 그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여자 친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거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그도 감동합니다.
나중에 자신 대신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삼촌과 대결 중에 그는 나머지 눈 하나와 자신에게 눈을 찾아 준 한 인간의 생명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눈 대신 한 인간을 살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삼촌은 신이 인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눈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비웃습니다. 그러나 주인공 신은 두 눈을 잃어보았기에 자신도 눈을 잃으면 한 인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결국 삼촌을 몰아내고 다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봉헌은 왜 하는 것일까요? 가진 것을 주님 것으로 인정하며 바쳐보고 불편해 보아야 자신이 주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희생 제물을 진정한 의도로 한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특별한 존재라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와도 잘 섞이게 되고 이 능력이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안 바치는 것이 낫습니다.
영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현재 ‘마블’과 ‘DC’의 대결을 흥미 있게 지켜보실 것입니다. 마블에는 아이언 맨이 있고 토르나 캡틴이 있습니다. DC엔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슈퍼맨, 원더우먼, 배트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매번 마블이 흥행하고 DC는 만드는 것마다 거의 망하고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마블은 자신들의 능력을 잃었을 때의 고뇌와 비참함, 그리고 그것을 통한 깨달음에 비중을 두는가 하면, DC는 무조건 더 강력해져서 이기는 게 좋다는 힘의 논리만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그런 초인적인 인간을 보면서도 슈트가 벗겨진 아이언 맨, 망치를 잃은 토르, 방패를 빼앗긴 캡틴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봅니다. 그러니 공감을 할 수밖에 없고 흥행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 봐야 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내가 가진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으며 모두 가진 모습을 하면서도 가난하고 비천한 이웃과 잘 섞일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가 되려 하지 맙시다. 다른 포도나무처럼 주님께 자신의 포도를 봉헌하는 포도나무가 됩시다. 언젠가 그 무화과나무 한 그루는 잘려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희생 제물이 이웃을 향한 자비로 이어지려면 특별해지려는 마음을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끊어버리려는 의도가 있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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