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20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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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2020.7.31.)

by honephil 2020. 7. 31.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은 1491년 스페인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군인이 된 그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을 치료받다가 현세의 허무함을 깨닫고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시작한 이냐시오는 마흔여섯 살에 사제가 되었고, 이후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를 설립하여 오랫동안 총장을 맡았다. 그는 『영신 수련』 등 많은 저술과 교육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였으며, 교회 개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1556년 로마에서 선종하였고, 1622년에 시성되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랍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예수님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가르침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둘러싼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목수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시자 평범한 동네 청년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서’ 놀랄 만한 지혜와 힘을 얻었는지 그것만 궁금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참인간이시자 참하느님으로 고백합니다. 그분께서는 인성과 신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한 면만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때로는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이것들은 편하고 좋을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 안주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새로움이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알고 있는 대로만 듣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은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들을 때 새겨듣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다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지루하고 진부하게 느껴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나자렛 사람들처럼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뜻을 찾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변하게 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 힘과 늘 새롭게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통하여, 나의 삶을 통하여 듣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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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아버지는 자녀에게 망령이 되는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을 여전히 요셉의 아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지금 시대에도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오류에 빠지는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의 하나인 ‘햄릿’의 이야기를 통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tvn의 ‘책 읽어드립니다’에서 참조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인물 중 누가 나자렛 사람들과 비슷한지 맞추어보시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12세기 덴마크 왕국 엘시노어 성에 자정이면 나타나는 죽은 왕의 혼령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령을 본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는 왕자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독일 유학중이었던 햄릿은 아버지의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아버지를 만납니다. 유령이 된 아버지는 자신이 뱀에 물려 사고사로 죽은 것이 아니라 독살당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죄 중에 죽어서 회개할 기회가 없었기에 천국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왕이 되어야 하지만 현재는 아버지의 동생인 삼촌 클로디어스가 자신 어머니와 결혼하여 왕이 되어 있었습니다. 범인은 삼촌일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햄릿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미친 척을 하기 시작합니다. 햄릿은 나라의 광대들을 모으고 ‘쥐덫’이라는 연극을 기획합니다. 왕이 어떻게 살해되는가를 현재의 왕 앞에서 보여주며 현 왕의 표정을 살피려 한 것입니다. 왕은 연극을 끝까지 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기도를 합니다. 햄릿은 그때 삼촌을 죽이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으나, 아버지는 지옥에 갔는데 삼촌이 회개하여 천국 가면 안 된다고 여겨 잠시 복수를 미룹니다.

 

      햄릿은 자신도 좋아하고 자신을 좋아하는 오필리아라는 여인에게 “우리는 모두 저주받은 사람들이오. 수녀원으로 들어가시오!”라고 모질게 말합니다. 화가 난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는 이를 따지기 위해 왔다가 햄릿이 어머니와 하는 이야기를 커튼 속에 숨어 듣게 되었습니다. 햄릿은 어떻게 아버지를 죽인 숙부와 결혼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커튼에서 부스럭하는 소리를 듣고는 칼로 찔러버립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그렇게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오필리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플로니어스의 아들이자 오필리아의 오빠인 레어티스는 왕 클로디어스와 짜고 햄릿을 죽여 복수하려 합니다. 검술 시합에서 칼에 독을 발라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검술 시합에서 햄릿이 레어티스를 압도합니다. 이에 불안은 느낀 왕은 포도주에 독을 타서 햄릿에게 마시라고 건넵니다. 그러나 햄릿의 땀을 닦아주는 왕비가 마시고 쓰러집니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을 안 햄릿은 왕을 찔러 죽입니다. 레어티스도 상처가 심해 죽습니다. 햄릿도 독이 든 칼에 상처를 입은 터라 서서히 죽어갑니다. 처음에 선왕의 유령을 보았다고 알려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도 자책하며 죽으려 합니다. 햄릿은 죽어가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죽네, 호레이쇼. 아, 내가 진실을 말해줄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오. 이 모진 세상에서 고통의 숨결을 지속하며 내 이야기를 전해주게.”

 

      자, 찾으셨나요? 나자렛 사람들은 이 등장인물 중 누구와 가장 가깝습니까? 바로 햄릿입니다. 햄릿은 성인이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망령에 여전히 휘둘리는 인물입니다. 사람은 아버지만큼 자랍니다. 물고기가 어항의 크기에 자기 몸의 크기를 정하는 코이라는 물고기와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아버지를 배척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하셨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못하는 현시대의 모든 이들을 대변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겨야 하는 연령대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아버지에게 지배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삶에 간섭하고 영향을 주려고 한다면 자녀를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만들어버립니다. 유다인들처럼 빨리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에게 망령으로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어쩌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반 고흐는 엄격한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 참으로 엄청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나라 속담에서는 자녀에게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사라져 주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가 이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겨 그 그릇에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의 부모가 되기를 멈추지 않고 강요하게 된다면 그 부모는 자녀들에게 망령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나자렛 사람들처럼 인간적인 아버지라는 틀에 머물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끄시려는 하느님 아버지의 길을 막아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https://youtu.be/CPzPR0gpWj8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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