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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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2020.7.22.)

by honephil 2020. 7. 22.

복음서의 여러 군데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십자가 밑에(마태 27,56 참조), 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 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 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었다(요한 20,18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5 참조) 그녀에게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함께하였던,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활동에 함께하였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에도, 예수님을 무덤에 모셨을 때에도 줄곧 함께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삶에서 중요한 때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등장합니다. 또한 모든 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것처럼 그녀는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가장 먼저 전하는 인물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실 때에 그녀는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님 부활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주님 부활이라는 우리 믿음의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이렇게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하여 전해집니다.

주님 부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들음’과 ‘기억’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예수님을 기억하고 알아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그분의 말씀을 귀담아들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 곁에 서 계신 그분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그 말씀에 응답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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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스승은 제자의 일곱 마귀를 방치하지 않는다>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여인입니다. 그 이후에는 극기의 삶으로 이전의 타락했던 삶에 대해 속죄하며 살았다고 전해집니다.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16,9)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마리아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곱 마귀’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만 있었던 것일까요? 복음서는 우리 모두를 위한 내용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우리 모두, 즉 교회를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우리는 모두 일곱 마귀가 들린 생활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7일간의 창조가 이루어지기 7일 전의 인간의 동물적인 상태가 일곱 마귀가 들린 상태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래서 창조로 새로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 안에 이 일곱 마귀가 있다고 가르쳐왔는데, 이를 ‘칠죄종’이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일곱 가지 죄의 뿌리에서 다른 모든 죄악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① 교만, ② 탐욕, ③ 정욕, ④ 질투, ⑤ 과식 ⑥ 노여움, ⑦ 게으름”입니다. 사실 이 일곱 가지 죄의 원인은 ‘삼구’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구 중 마귀가 ‘교만, 질투, 노여움’이고, 육신이 ‘정욕, 과식, 게으름’이며, 세속이 ‘탐욕’입니다.

 

      부모는 자녀의 스승입니다. 만약 부모가 자녀의 일곱 마귀를 신경 쓰지 않고 무언가를 가르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 자녀를 이용하는 모기가 됩니다. 그리고 모기의 최후는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


      영국에서 이런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하고 설움을 느끼며 살던 어떤 영국 어머니는 외아들 ‘티모스 베이커’를 무시받지 않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1등을 하라고 교육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영국 옥스퍼드는 물론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도 합격 통지서를 보내왔습니다.


      그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저녁 어머니는 아들과 그의 여자 친구 문제로 큰 싸움을 벌였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를 마친 후 더 좋은 환경의 여자 친구를 사귈 수 있으니 당장 헤어지라고 했고, 화가 난 아들은 어머니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였습니다.


      기자회견 때 티모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어머니로부터 무조건 1등을 하도록 강요받고 살았다. 그리고 나의 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쟁취해야 한다고 배웠다. 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나의 꿈을 막는 자는 누구도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장애물이 어머니일지라도 내 앞에서 치워버려야 했다. 그래서 내 꿈을 막는 어머니를 죽여버릴 수밖에 없었다. 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에게 남을 이겨야 하고 당연히 1등을 해야 한다는 교만과 질투, 노여움의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스승의 최후입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하위인 것은 어쩌면 자녀들의 일곱 마귀를 방치하며 교육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서편제’로 유명한 소리꾼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의 제자입니다. 김소희 명창이 칠순이 넘어 수업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난한 중학생 오정해를 제자로 받아주었습니다. 오정해는 김소희 명창과 함께 기거하며 소리보다 먼저 인간이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물에 청바지를 빨아 직접 짜서 널어야 했습니다. 대충 짜서 널었더니 스승은 그것을 다시 물속에 집어던졌습니다. 손이 시리더라도 끝에서부터 꼭꼭 짜서 널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승은 음식이 쉬어도 버리는 일이 없었습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쉰 음식을 먹으니 중학생 정해도 먹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혹독하게 교육한 이유는 나중에 소리를 하러 다닐 때 아무 음식을 먹더라도 탈이 나지 않는 몸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꼼꼼한 삶의 자세는 작은 것이라도 완벽하게 해내는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그 나이에 누구도 담지 못하는 ‘한’의 감정을 담게 되었습니다. 대회에 나갈 때 예쁜 한복과 부채가 필요했지만 가난해 돈이 없던 정해에게 스승은 자신의 저고리를 줄여 입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력으로는 당당히 1등을 하였습니다. 스승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대학교수가 될 것을 권했고 비록 스승이 세상을 떠났지만, 오정해 씨는 대학 강단에서 자신이 배운 것을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스승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스승님은 모든 것을 저에게 주고 가셨습니다. 언제나 가슴에 묻고 ‘스승님이 웃고 계시겠지!’라는 마음으로 소리를 합니다.”

 

      누군가의 일곱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의 피가 필요합니다. 마치 망치와 정으로 큰 돌의 쓸모없는 부분들을 쪼아내는 노력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은 제자의 원망과 따가운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피 흘림으로 일곱 마귀를 쫓아내고 그 안에 당신이 자리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래서 참 ‘스승’으로서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십니다. 우리의 삶은 일곱 마귀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로 향하는 제자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일곱 마귀, 즉 삼구를 없애는 시작은 ‘십일조’입니다. 이 봉헌은 자신의 처지를 알게 하여 겸손하게 하고 탐욕을 줄이며 검소하고 정결하게 살게 합니다. 일곱 마귀를 가두는 가장 좋은 방법이 십일조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참 스승이 되려면 자녀에게 이것부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https://youtu.be/zvnzEbIe0MQ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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