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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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20.7.21.)

by honephil 2020. 7. 2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미카 예언자는 책의 마지막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찬양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미카’라는 이름의 뜻이기도 한 이 표현은 하느님의 업적과 그분의 위대하심을 잘 나타냅니다. 대천사 미카엘도 같은 뜻의 이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실하시며 그들의 죄를 묻지 않으시는, 전능하시면서도 자애가 가득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이런 하느님의 업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관계 안에서 지속됩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혈통이 중심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연결됩니다. 그 뜻을 따르고 실행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백성이자 새로운 가족입니다. 그들은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입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입으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마태 7,21 참조), 삶을 통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정체성입니다. 새로운 관계 안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은, 나약하지만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런 우리를 격려하시고 우리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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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사회는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에는 ‘비대면’ 사회가 온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대면 사회는 오지 않습니다.

 

      어떤 분들은 굳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관계를 확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사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귀찮고 심지어는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기회로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전화로, 전화로 하기보다는 문자로 접촉을 피하기도 합니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멀리 떨어져 문자로만 대화하는 것과 한집에서 티격태격하면서라도 함께 사는 것은 천지 차이일 것입니다. 어떻게 TV로 미사를 하는 것과 직접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아기를 TV 화면을 통해서만 사랑을 느끼게 하며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람은 귀찮더라도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본성이고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통하지 않고서는 사랑을 알거나 배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제 묵상에서 사랑에 대한 배움의 자세가 곧 삶을 대하는 자세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삶의 유일한 가치인 사랑을 배울 수 있다면 인간관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사춘기 호기심이 발동하여 성적인 그림이나 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성에 관해 칠판에 그래프를 그려가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숙맥이었습니다. 여자에게 말을 어떻게 붙여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남녀관계가 그저 성적인 관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대학에 가서 여자를 만나고 나서야 남녀관계가 성적인 것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에 집중하면 관계가 쉽게 깨어질 수 있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분명 인간관계는 아픔을 주지만 인간관계가 아니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것은 없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것, 사랑을 아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가치요 목표라면 그 사랑은 지식으로 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며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었다는 워런 버핏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한 사람의 강연을 듣고 나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과 식사를 하려면 수십억 원의 돈을 자선기금으로 내게 합니다. 워런 버핏은 한 번의 만남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워런 버핏과의 점심 식사」라는 책을 쓴 ‘가이 스파이어’는 2008년 워런 버핏과 한 끼 식사하기 위해 무려 65만 달러, 한화로 약 8억 원을 지급하였습니다. 물론 이것도 추첨으로 된 것이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 스파이어는 명문 옥스퍼드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여 부자 아버지를 둔 엄친아였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입사한 회사는 순진한 일반 투자자들에게 쓰레기 같은 주식을 팔아먹는 정말 쓰레기 같은 회사였습니다. 그렇게 돈을 버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한 번 만나 식사를 하는데 8억을 써가며 워런 버핏을 만나 조언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은 참 가치투자의 방향으로 변하였습니다.

 

      한 사람과 만나 식사 한 끼 하기 위해 적게는 수억 원, 많게는 수십억 원을 내야 하는데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 추첨에 당첨되어야만 합니다. 그 사람이 책이나 화면을 통해 주는 정보와 직접 만나서 주는 정보는 그 질이 같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생을 바꿔줄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성체 앞에 얼마나 나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보며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당신을 만나러 온 이들을 당신 가족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족을 하느님이나, 요셉과 마리아로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과의 관계 확장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배움과 대인관계를 위한 직접적 접촉은 하나입니다.

 

     힘들지만 더 넓게 관계 맺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 관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관계 확장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느님을 알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자세는 ‘배우고 싶은 욕망’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데이비드 맥클란 박사는 25년 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연구했습니다. 그가 알아낸 것은 성공의 99% 이상이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좌우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이 곧 여러분입니다. 진리는 찾는 많은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그러면 진리 안에서 살고 발전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으로 인간관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배우고 싶지 않다는 말이고 그러면 영원히 지속할 진실한 삶의 의욕이 생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의 접촉 안에서만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9h1fgzfsMiU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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