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연중 제9주간 토요일 (202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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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연중 제9주간 토요일 (2020.6.6.)

by honephil 2020. 6. 6.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8-4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38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이르셨다.
“율법 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긴 겉옷을 입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즐기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엄중히 단죄를 받을 것이다.”
41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돈을 넣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 나오는 과부의 모습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만난 과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엘리야가 사렙타에 사는 과부를 찾아가 물 한 그릇과 빵 한 조각을 청합니다. 이때 과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 열왕 17,12).


오늘 복음의 과부가 봉헌한 돈은 렙톤 두 닢입니다. 요즈음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그녀의 전 재산은 약 천 원에 불과합니다. 한 끼를 겨우 때우기에도 부족한 이 돈을 그녀는 왜 하느님께 봉헌하려고 하였을까요? 어쩌면 그녀는 더 이상 살아갈 여력이 없는 것에 한탄하며 가지고 있던 돈을 하느님께 바치고 난 뒤에 사렙타의 과부처럼 죽으려고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가 놓인 상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과부의 헌금을 두고 하시는 말씀을 전 재산을 바친 것에 대한 칭찬으로만 알아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풍족하게 가진 것이 많음에도 목숨이 위태한 과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 백성들의 완고한 마음을 두고 탄식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내는지에 대해서는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지난 목요일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라는 율법 학자의 말을 두둔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에서 우리는 어떤 메시지를 새겨들어야 할까요? 단순히 교회에 많은 헌금을 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새겨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사람들, 하루하루 삶의 무게에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무심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기를 오늘 복음이 가르쳐 줍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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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6월 6일 토요일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배우는 하느님의 사람 (마르 12, 38-44)

“43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44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 43-44)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이를 채워나가려고 노력하는 데 있습니다.  일반 사람들과 성인들과의 다른 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계명은 이러합니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 29-30)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느님을 사랑한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둘은 동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부의 헌금을 통해서 이 계명의 실천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율법학자들의 교만함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이들은 긴 겉옷을 입고 다니면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가장 약한 계급에 속했던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동시에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는 길게 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에는 상대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대성이란 비교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 덜 소중한 것을 포기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를 도구적인 관계로 생각한다면 그 관계는 목적에 의해서 유지되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은 인격적인 관계의 객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관계를 맺을 때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관계를 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관계의 한 예를 알려주십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율법학자들의 위선적인 경건함과 가난한 과부의 참된 거룩함을 대비시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헌금함에 예물로 내는 가난한 과부와  풍족하게 살아가는 부자가 하는 헌금을 두고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액수는 적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헌금함에 예물로 바치는 가난한 과부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더 많은 예물을 바쳤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과부가 바치는 ‘렙톤’은 그리스의 동전 중에서 가장 작은 동전입니다. 그리스 은전 ‘드라크마’의  128분의 1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드라크마’는 로마의 은전 데나리온과 같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과부가 헌금한 것은 아주 적은 액수의 동전 두 닢을 헌금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동전 두 닢은 과부가 가지고 있던 돈의 전부였다고 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풍족한 데서 얼마씩을 넣었다고 합니다. 액수로 따진다면 부자들이 훨씬 많은 돈을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헌금을 바침으로해서 굶어야 하는 사람과 상대적으로 액수는 많아도 헌금을 하고도 여유 있게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서 더 많은 헌금을 한 사람은 바로 가난한 과부의 헌금임을 예수님께서는 강조하십니다. 인간의 눈에 비치는 액수와 하느님의 눈에 비치는 액수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헌금하는 액수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사람의 참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얼마를 바쳤는 가에 관심을 두시기보다는 자신의 몫으로 얼마나 남겨 놓았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하느님께 바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이 훨씬 더 많았고, 가난한 과부는 가지고 있던 것을 바치면서 자기 것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바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래하면서도 여전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생각보다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기 해서 노력하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고 듣고 행하는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합니다. 

가난한 과부의 행동은 저에게 참으로 큰 용기를 줍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 나머지 것들은 곁들여서 받게 된다(마태 6, 33)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별 뜻이 없는 구절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이 말씀에 담긴 성경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주는 기쁨은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합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말씀의 실천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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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마틴 니뭴러(Martin Niemoller)라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가 옥고를 치른 후 위대한 「2차 대전 책임백서」라는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체험이 나옵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느 날, 니뭴러 목사가 일곱 번이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 줄로 서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데 심판대 앞에 선 사람들은 한 사람도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니뭴러 목사도 그 대열에 서 있는데 어떤 한 사람이 이상하게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보면서 자꾸 변명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누구인지 자세히 바라보니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는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나를 반대하고 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내게 사랑으로 예수님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은 평생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니뭴러 목사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틀러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네 책임이다.”

이 말을 들은 니뭴러 목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네가 8년 동안 히틀러 정권에 대해 항거만 했지 한 번이나 그에게 복음을 전했느냐?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죗값이 너에게도 있는 것이다.”

이 똑같은 꿈을 일곱 번이나 꾸고 “이 전쟁의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었구나!”라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의 눈물로 쓴 책이 「2차 대전 책임백서」라고 합니다.

 

      신앙인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율법 학자’와 ‘율법주의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보기에는 율법주의자일뿐인 이들이 율법 학자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것에 질책하십니다. 우리는 율법 학자가 되어야지,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차이는 바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생각으로 결정됩니다.

 

      저 먼 나라의 한 어린이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그 책임이 나에게 없다고 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율법’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웁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는 자연과 세상이 이렇게 되어 가는 것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믿지만, 율법주의자는 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 학자들은 겉모양으로는 모든 율법을 다 알고 지킨다고 사람들이 여기게끔 꾸미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가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 곁에는 천 원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가 있었습니다. 그 과부는 천 원까지 헌금통에 집어넣었습니다. 주님께만 희망을 거는 행위입니다. 주님께서 보살펴주시지 않으면 더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은 그런 사람을 자신의 형제처럼 사랑하라는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그러나 율법 학자들은 그런 책임을 무시하면서 완전한 율법주의자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 학자가 아니라 실제적인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린 이유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율법까지도 이용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낳은 아들이 카인입니다. 그는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생을 지키는 사람이냐고 그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 말 안에는 자신 안엔 율법이 없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율법은 책임입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책임을 깨우쳐주는 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일본 소프트 뱅크의 손정희씨가 중병에 걸려 오래 못 산다는 판정을 받았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한 이름 모를 소녀를 생각했습니다.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과 하나라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처럼 미소 짓게 하고 싶어 졌습니다. 그러자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 율법이 비로소 그의 마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은 생명이요 건강이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건강이 회복된 것입니다. 율법은 세상 가장 먼 나라의 한 아이까지도 나의 책임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책임이 일지 않으면 나는 구원되는 율법 학자가 아니라 구원 못 받는 율법주의자로 머물게 됩니다.

https://youtu.be/p2hMywVuUG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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