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 때였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제 부모님을 잘 알고 있는 교우분들 가운데 어느 분이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아버지를 참 많이 닮으셨네요.” 옆에 있는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어머니를 쏙 빼닮으셨어요.” 저는 이 두 분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였습니다.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 닮으셨어요.”
사실 생각해 보면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태생적으로 닮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한 가정을 함께 책임지며 살아가는 동안 습관, 식성, 생활 방식, 가치관 등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까지도 비슷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비단 제 부모님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본당 주임 신부 시절, 수많은 부부를 바라보며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라는 말이 떠오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를 이루시지 않겠습니까? 유한한 사랑을 하는 이들이 서로 닮는데,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영원무궁토록 무한한 사랑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세 위격은 서로의 존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에리히 프롬이 말하였듯이 사랑은 본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는 상대방을 자기 방식대로 끌어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존재 방식을 있는 그대로 잘 간직하도록 애써 줍니다. 그리하여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서로 일치하시는 가운데서도 성부의 위격이 다르고 성자의 위격이 다르고 성령의 위격이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외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이 사랑의 신비 안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매 순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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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읽는 말씀
2020년 6월 7일 일요일
삼위일체 대축일에 (요한3, 16-18)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한 3, 16-17)
어떤 분이 저에게 신부님께서는 성경을 다 이해하십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저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제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내용보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들을 시간이 지난 후 기도를 하면서 깨닫게 되기도 하고, 동시에 이미 알고 있었던 말씀들도 더 깊게 이해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일인가 봅니다.
교리 중에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들은 인간적인 이해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신비라고 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 함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열어 보여 주셔야만 우리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주심을 우리는 ‘계시’라고 말하며 우리의 종교인 그리스도교를 계시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믿음은 하느님의 신비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 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은총의 바다에 자신을 던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아감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토대 위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자리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과 하느님이신 본체와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의 확산은 위격으로, 그 사랑의 수렴은 본체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신비에 참여 함을 말합니다. 인간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삼위일체의 사랑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체험하고 이 신비로운 사랑을 구체적인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하고자 다짐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전례적으로 지난 주일까지 부활시기를 보내고 다시 연중 시기를 맞이해서 그 첫 주일을 삼위일체 대축일로 정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사랑의 관계를 우리가 깊이 묵상하고 이 사랑의 신비를 우리의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초대합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삶의 현장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셨던 창조의 세계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와 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기에 인격이란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서 조금씩 사라져가는 단어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무너져 버린 그 질서가 회복되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창조는 무질서에 질서잡힘으로 나아감을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창조의 회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바다에서 우리가 참여해서 만들어 가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 하시기에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십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생하는 우리를 다시 당신 안에서 영원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시기 위함입니다.
성자의 사랑을 느껴보고자 합니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시지 않고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신 분이십니다.
성자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보호자’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이 성령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양식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속에서 거룩함을 바라보고 이 거룩함을 세상에서 구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 하면서 우리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이신 하느님을 바라봅니다. 사랑의 확산과 수렴이라는 관점에서 이 신비를 이해합니다. 무한히 반복되는 이 사랑의 확산과 수렴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로 나아갑니다.
하늘나라는 내가 주어가 되는 나라가 아닌 하느님이 주어가 되는 나라입니다. '함께 함'의 나라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나를 내어 놓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함께 함’의 이상적인 모습인 삼위일체의 사랑의 관계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살아 있다면 필연적으로 맺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를 삼위일체의 신비적인 사랑의 관계로 확산, 구체화시키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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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에서는 매우 유명한 ‘김동호’ 목사가 있습니다. 작년에 폐암 판정을 받고 폐 일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술보다 더 힘든 것은 항암이었다고 합니다. 항암 중 졸도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옥의 고통을 느끼던 지난 한 해가 평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하늘을 두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항암의 고통 중에 침대에 쓰러져 밥도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40장 1절의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 백성을 위하라!”
처음엔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무슨 내 백성을 위하라고 하시나?’라고 의문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로 암의 고통을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그 고통만큼 당신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너도 아파 봤으니까 알잖아. 내 사랑을 전하라!”
침대에 실려 다녀야 하는 상황에서 바로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6시마다 “날마다 기막힌 새벽”이란 이름으로 항암의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벌써 300회가 넘었고 1년에 벌써 구독자가 12만 명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고통스러운 가운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서 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분의 자녀가 이런 댓글을 달아주셨다고 합니다.
“그 지옥같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천국 같이 지내다 가셨습니다.”
[출처: ‘김현정의 뉴스쇼’, 김동호 목사, ‘지옥 같은 항암, 천국처럼 행복했다’]
번지점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위험한 외줄 타기나 암벽등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위험한 스포츠를 즐길까요? 그 이유는 죽음 가장 가까이에 있을 때 가장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곳에서는 살아있음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이는 삶과 죽음이 세트 상품이기에 그렇습니다. 삶과 죽음은 한 세트이기 때문에 하나가 커지면 다른 것도 커집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재미없는 관계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관계입니다. 그 안에서는 친밀함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행복은 친밀한 관계에서 옵니다. 그런데 관계가 친밀하려면 그만큼 멀어지는 고통도 감수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발에 줄 하나 매달고 뛰어내릴 용기를 내지 못하면 살아있다는 쾌감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관계도 하나의 모험입니다. 내 전부를 내어줄 용기가 없다면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행복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계가 ‘믿음’에 바탕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선물’에 의해 생깁니다. 모르던 두 사람이 사귀면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선물을 합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사랑이 담깁니다. 누군가 사랑한다고 말하며 이쑤시개를 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사람과 친밀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선물 안에는 그 사람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 안에 그 사람의 생명이 담길 때, 그리고 상대가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친밀한 관계가 만들어지고 그 친밀한 관계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의 선물이 부담스러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과도 같은 선물이 쓸모없게 됩니다. 이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받는 상처는 그 선물을 위해 얼마나 투자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만약 그 선물이 생명과도 같다면 그 사람은 거부당할 때 지옥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관계를 위해 조금만 투자합니다. 상처받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라면 상처는 받지 않을지언정 삼위일체 관계가 이루어져 느끼는 천상의 행복은 맛볼 수 없습니다. 천국의 행복을 맛보려면 지옥의 고통도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관계 안에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지옥까지도 내려가십니다. 구원 역사 안에서의 이런 관계는 삼위일체 관계의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차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의 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딱 그 정도만 선물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하며 만약 하느님이 안 계시더라도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와의 삼위일체 관계를 통해 느끼는 행복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당신 살과 피를 선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는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성령 선물의 보답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부활과 승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십니다. 이렇게 되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관계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행복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투자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아니 관계의 친밀도에서 옵니다. 관계의 친밀도는 내어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조금 내어주는 관계는 조금 깊은 관계이고 많이 내어주는 관계는 아주 깊은 관계입니다. 평생 친구 같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것인지는 내가 관계를 위해 지옥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십자가의 내어주심을 통해 우리도 삼위일체 관계에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관계를 통한 천국의 행복과 지옥의 고통은 세트 상품입니다. 사랑을 위해 지옥을 감수할 용기가 있다면 삼위일체 행복을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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