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8ㄱㄷ-34
그때에 28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30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1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그러자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34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맹자』에 알묘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싹을 뽑아 올려, 자라는 것을 돕는다.’라는 뜻인데 이와 관련하여 송나라의 어느 어리석은 농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심은 곡식의 싹이 더디게 자라자 이것이 걱정되어 싹을 잡아당겼습니다.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오늘 내가 큰일을 했지. 싹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었단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이 밭에 나가 보니 뿌리 뽑힌 싹들이 햇볕에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나무와 꽃을 하루아침에 다 자라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 농부는 몰랐던 것입니다. 생명이 담겨 있지 않은 공산품이야 정해진 시간 안에 완성품을 만들 수 있지만,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여 세월과 함께 자라도록 인내해야 하는 것이 이치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생명이기에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기계로 뚝딱 만들어지는 완제품처럼 금세 완성될 수 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가 자라는 동안 산모가 고통을 겪듯이, 논밭에 뿌린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의 수고가 필요하듯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도, 이웃을 향한 사랑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인내와 좌절, 땀과 눈물이 녹아 들어간 세월이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나’의 사랑이 작고 미약하다고 쉽게 좌절하지 맙시다. 부족한 사랑을 일부러 키운다고 무리하여 알묘조장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맙시다. 그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열매 맺기를 희망하며 세월과 함께 우리의 사랑을 잘 가꾸어 나갑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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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 프라임 ‘엄마가 달라졌어요’에 한 엄마가 아들만 그렇게 미워하는 사례가 나왔습니다. 딸은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아들만 보면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자신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잘 안 되어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엄마는 자신의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 다음에 태어난 남동생만을 사랑한 그 엄마도 미웠고 남동생도 미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아들이 남동생처럼 느껴지고 딸은 불쌍한 자신의 모습처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흐르지 못하는 그 엄마에게 부모를 용서하는 심리치료를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어머니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용서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니 이전과는 다르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었습니다.
남동생은 미워하고 자신만 사랑해주는 엄마를 보면서 딸은 마음이 편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는 것이기에 자신을 사랑해줬던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부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프러포즈를 해 온다면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믿어야 할까요? 물론 자신은 진심이라 믿을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은 흐르는 것이기에 위로부터의 흐름이 막힌 상태로는 사랑을 흐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사랑은 호르몬의 결과일 뿐, 참으로 사랑은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그 말을 믿어야 할까요? 이는 구약 없이 신약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은 하느님 사랑의 회복을 말하고 신약은 이웃사랑의 회복을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고 그다음이 이웃사랑이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분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사랑을 바로 믿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해준 이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를 먼저 살펴보십시오.
오리건주에 있는 한 중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학교의 여학생들은 립스틱을 화장실 거울에다 묻히곤 했습니다. 키스 연습을 하는 것인지 청소하는 분만 곤혹스러웠습니다. 그 자국이 점점 많아져 골칫거리가 되자, 마침내 이 학교의 교장은 조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장은 모든 여학생을 화장실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청소 담당자는 거울 청소가 얼마나 어려운지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대 자루를 먼저 화장실 변기에 넣어 빤 다음 그것으로 거울을 닦았습니다. 여러 학생이 갑자기 헛구역질했습니다. 그 이후로 거울에 키스하는 학생은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입 맞춘 거울이 무엇으로 닦이고 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물이 달콤해 보일지라도 그 안에 독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쥐약을 먹지 않으려거든 나에게 누군가 주는 선물이 그 사람의 부모나 하느님에게 향해야 할 것이 아닌지 먼저 분별해보아야 합니다. 하와의 선악과를 덥석 받아먹으면 자신도 죽습니다.
어떤 분은 신자들의 돈을 사용하는 본당의 사제나 사목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성당엔 조금만 내고 나머지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안 되느냐고 묻습니다. 선악과를 이웃에게 주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용하든 그것은 교회의 몫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은혜에 십 분의 일이나마 봉헌하며 감사를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입니다.
성당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놀러 가려고 하는 아버지를 좋게 보아야 할까요? 사랑은 위로부터 흐르지 않으면 그 사랑이 하와가 내어주는 선악과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사랑이 거짓임을 알아내는 법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준 이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됩니다. 부모를 먼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자녀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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