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복음서 6장의 전체 맥락 안에서 빵을 많게 하신 표징 뒤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성체성사에 대한 언급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의 빵이라는 담화 안에서 그 표징을 통하여 드러난 예수님의 몸은, 구약 성경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의 의미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고찰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은 만나의 신비로움을 하느님의 지혜를 담고 있는 은총의 선물인 율법의 상징이라 여겼습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배고픔을 충족시켜 주는 참된 삶의 양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인 이들은, 마지막 만찬을 통하여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제공되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신명 8,3 참조)을 율법을 통하여 배우고 믿었던 이들에게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한 선택을 재촉합니다. 유다인들처럼 듣기 거북하다고 투덜거리며 떠날 것인지, 아니면 제자들처럼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말씀을 전하는 이가 될 것인지, 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우리에게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오늘 독서에서, 고통받는 주님의 종에 대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반복하여 읽으며 그 뜻을 헤아리고자 노력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와 같은 자세로 늘 성경을 읽고, 또 그 뜻을 풀이해 준 필리포스처럼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이 부활의 시기를 보내며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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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목요일(부처님 오신 날)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44-51)
부처님 오신 날, 사방세계에 나투신 부처님의 가피를 가톨릭 신부가 기원한다면 이상스레 보겠지요. 올해는 시절이 하수상한지라 절집 분위기도 예년보다는 적적할 테니 조심스레 손 모아 청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본당 꼬마 신부일 때 우리 성당 건너편에는 큰 사찰이 하나 있었습니다. 왕래도 좀 있는 편이어서 성탄과 부활 밤미사 때 스님들이 축하사절로 오셨죠. 당연히 우리도 답방으로 부처님 오신 날이면 꽃바구니 들고 가야하는 법. 제가 그해의 축하사절로 절을 방문했습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수단을 잘 다려 차려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법회의 맨 앞자리에 앉게 됩니다. 절집 대웅전은 마룻바닥인지라 방석 위에 사뿐히 앉아 의젓하게 참석하는데, 당연히 시선집중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큰스님이 필^^ 받으셨는지 법문을 무려 두 시간이나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가부좌 틀고 있는 다리가 저려오는데 드디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이러다간 아무래도 일어날 때 이 다리로는 휘청거리겠구나, 하여 옆에 앉은 제 또래 스님에게 살며시 여쭙니다. ‘스님, 다리가 너무 저리네요.’ 저는 그러면 잠깐 일어나 어디로라도 데리고가서 다리 펼수 있게 해주리라 기대했죠. 그러나 염화미소를 지으며 그 스님이 제게 건넨 경악스러운 말인 즉, ‘코에 침을 바르시지요!’ 중노릇보다 신부노릇하게 해주셔서 하느님께 절로 감사드렸습니다.
드디어 법회가 끝나고 공양 시간. 그날은 산채 비빔밥이 메뉴였습니다. 우리 집에 스님들 오시면 불교 예법에 맞게 육고기 싹 빼고 오신채 안넣은 맞춤 식단을 내놓았는데, 이 집에는 비빔밥의 필수 요소, 계란 부침이 없더군요. 그래서 제가 짐짓 놀렸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손님인데 대접이 소홀하십니다!!’ 스님은 잔말말고 먹으라는 눈빛으로 공양게(식사 기도라고 할까요)가 적힌 종이를 제게 들이밀었습니다.
계공다소량피래처(計功多少量彼來處): 온갖 정성이 두루 쌓인 이 공양을
촌기덕행전결응공(村己德行全缺應供): 부족한 덕행으로 감히 공양을 받는구나
방심이과탐등위종(防心離過貪等爲宗): 탐심을 버리고 허물을 막고
정사양약위료형고(正思良藥爲療形枯): 바른 생각으로 육신을 지탱하는 약을 삼으며
위성도업응수차식(爲成道業膺受此食): 도를 이루고자 이제 먹노라.
다른 해석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건강을 유지하는 약으로 알아 진리를 실천하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보다 현대화된 표현의 다른 버전도 있습니다.
‘한 방울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 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이 몸 길러
몸과 마음 바로 하여 바르게 살겠습니다.
공양을 베푸신 님들께 감사드리며
주는 기쁨 나누신 삶을 서원하며
감사히 이 공양을 들겠습니다.’
이 밥이 어디서 왔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 주셨다고, 아버지께서 먹이시는 것이라고, 이 빵은 당신의 살이라고 그러니 먹고 영원한 생명을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죄에서의 자유를 얻으라고.
밥 한 그릇을 먹으면서 조용히 읊어봅니다. 이 밥이 어디서 왔는지. 성체를 모시면서 나직히 되새깁니다. 당신의 살, 당신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한 나를 발견하겠다고. 밥 한 그릇 놓고 다투지 않고 밥 한 그릇의 정을 생각하고 밥 한 그릇에 감긴 온 세계, 빵이 되어 오시는 주님이 참 많은 생각을 던져주십니다.
부처님 오신 날, 청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불가의 이웃들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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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가능성과 희망으로 가득 찼던 삶.
그러나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시간.
...
죽어가는 동료를 병원에 데리고 간 그에게
간호사가 이름을 묻자 그는 대답한다.
“그는 은하수가 어디인 줄 아는 사람이었소.”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이샹향,
은하수가 어디인지 알고 있지만
사회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깔려서
서서히 파괴되어가는 사람들을 통해
작가가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통해 다시
억새풀처럼 끈질기게 태어나는 삶이다.
- 장영희의 ‘내가 너를 사랑한 도시’에서
경기도 이천 물류창고의 화재로
많은 분이 생명을 잃었다는 뉴스를 봅니다.
화마(火魔)에 갇혀 지하 작업실과
출구를 향한 대피에서 숨져간
고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저마다의 소박한 꿈을 간직하고
공사장에서 일하다 참변을 겪은
고인과 유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남편이며
누군가의 사랑이었기에
모진 生을 끈질기게 살아가며
생존이 아닌 저마다의 행복을 키워가던
모든 희생자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고
황망한 슬픔에 빠진 유족들을 위로해 주소서.
저희 기도와 연민이
힘겨운 이들에게 작은 사랑이 되게 하시어
따뜻한 이웃이 필요한 시간,
함께하는 이웃이 되게 하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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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ucoo3aywq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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