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20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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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2020.4.29.)

by honephil 2020. 4. 29.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소녀 시절 때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신비 체험을 모아 책으로 남긴 그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는 가타리나 성녀는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의 저자 루카는 박해의 위기 상황에서도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해야 하는 교회의 간절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신자들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억누를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없애 버리려는 사울의 움직임이 대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가 되어 박해를 피하여 흩어진 신자들은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이곳저곳에서 전하였고 뜻밖의 지역인 사마리아에서 큰 기쁨이 넘칩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귀환한 뒤 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서로 다른 곳에 지어 예배도 함께 드리지 않던 사이였습니다. 예루살렘을 갈 때도 일부러 돌아서 갈 정도로 멀리하던 사마리아 땅에 생명의 말씀이 전하여집니다. 일곱 봉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돋보입니다. 필리포스의 말에 사마리아인들은 귀를 기울여 한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으로 들으면서 부활의 기쁨을 계속 되새기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없애려는 사울의 악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필리포스의 맹활약이, 부활을 체험하고 또 늘 희망하며 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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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삶이라 고백하는
힘겨운 벗을 위해 기도합니다.

소박한 소망과
지친 사랑에
당신께서 날개를 달아주시길
기도합니다.

다시
감사와 찬양의
젖은 눈망울이
기쁨임을 증언하도록
저희 기도에
당신 축복을 담아주소서.

아멘 ♡

박유진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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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화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0-35)

하느님의 일이 다름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 곧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하시자 군중의 다음 질문은 믿을 수 있게끔 표징을 일으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한 모세의 표징을 예로 들죠. 이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이 주님께 불평합니다. 이집트에서는 굶지는 않았는데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되었노라며 모세와 아론 그러니 결국 하느님께 원망하는 것이죠. 그들의 불평에 대한 주님의 대책, 그것이 메추라기와 만나였습니다. 아침에 그들의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고 이슬이 걷히자 광야에 땅에 내린 서리같은 잔 알갱이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 이스라엘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니 ‘이게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만나는 그 뜻입니다. ‘이게 무엇?’ 그들은 몰랐습니다. 알 리가 없죠.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답니다(탈출 16장 참조).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스라엘을 먹인 양식입니다. 만나, 이름이 참 그렇습니다. 꿀 섞은 과자하면 제게는 농심 꿀꽈배기가 대번에 떠오르는데 그런 맛이었을까요? 먹어보신 분 안 계시겠죠. 그렇지만 이름이 ‘만나’ 아닙니까? 얼마나 맛있으면 히브리어로도 만나(?)일까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긴 합니다. 아무튼 세상에서 제일 맛있음직한 음식임이 분명하지 않나요.

질문해봅니다.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나요?’ 이렇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가 해준 음식요.’ 뭐 솜씨 좋은 분도 계시긴 하겠죠. 그러나 살림하시는 분들이 주로 모인데서는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뭐니뭐니 해도 남이 해준 음식요!’ 날마다 음식 차리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 것이죠. 아이들은 이렇게도 대답하더군요. ‘한 입만 하고 뺏어 먹은 거요!’
만나는 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손수 해주신 음식이었습니다. 미슐랭 별 세 개 저리 가라, 세상에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쉐프셨던 것이죠. 예수님은 이것을 교정하신 것이죠. 모세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만나를 주셨다는 것을. 모세는 단지 그 일의 중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표징을 보여달라는 이들은 어떤 이들인가요? 직전에 호수 건너편에서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은 그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들입니다. 자신들의 허기를 해결한 그 빵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요? 이들은 그 출처를 알았을까요? 예수님 손에 들려진 빵과 물고기가 한없이 불어나서 떼어도 나누어도 줄지 않은 그것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당신을 믿기 위한 표징은 이미 일어났노라고, 호수 건너편 그 들판에서 오병이어를 통해 광야의 만나 사건이 재현되지 않았느냐고. 만나처럼 너희가 먹은 그 빵과 물고기도 아버지께서 내려주신 것이라고, 그 표징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말입니다.

광야에서는 40년간 날마다 만나가 내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드디어 예리코에 들어가기 전 길갈에 도착하여 그땅의 소출로 양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더 이상 만나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매일 성체성사를 거행합니다. 이천년쯤 되어 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내가 생명의 빵이라 하신 그 말씀을 받아서 우리가 가야할 가나안 약속된 복지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겠죠. 당신께 오는 이는 굶주리지 않고 당신을 믿는 이는 목마르지 않는다는 약속을 신뢰하면서.


과연 그런가요? 오병이어의 표징을 체험하고서도 여전히 다른 표징, 다른 빵을 갈구하던 군중과 우리는 다른가요? 생명의 빵을 먹었으나 여전히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며 또 다른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과분하고 충분합니다.’ 도대체 그런 고백은 언제나 가능할까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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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AnLrpOX7e9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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