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묵상 ]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2019.12.26.)
오늘의 복음 말씀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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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17-22)
신학교는 방학이 되면 절간이 된다고 전에 한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성탄이라고 예외일리 없습니다. 바람이 불어 창문이라도 덜컹거리면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아무 소리도 안나야 하는데 기습적으로 들리는 소리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말이죠. 하루 종일이 그야말로 대침묵, 앵무새 루이와 어이가 가끔 떠드는 소리, 이따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약 먹을 시간 알리는 알람,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리고 나머지는 제가 만들어낸 소리뿐입니다. 고요한 밤만이 아니라 적막한 낮도 꽤 괜찮습니다.
성탄 즈음이면 방송에서 특집으로 볼만한 프로그램을 편성합니다. ‘나 홀로 집에’는 90년대 단골이었고 화제가 되는 혹은 주목할만한 그리스도교적 주제나 인물을 다룬 프로그램도 심심찮게 등장하죠. 이번에 제가 건진 것은 다큐 인사이트의 3부작, ‘세상 끝의 집-카루투시오 봉쇄 수도원’이란 작품입니다. 아직 한 회가 더 남아 있습니다. 못 보셨다면 다시 보기 강추입니다.
우리에게 영화 ‘위대한 침묵’으로 이미 알려진 그 수도회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눈 내리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입니다. 완벽한 침묵, 철저한 가난, 단순한 봉헌이라는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도자들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화려하고 시끌벅적 요란해야 성탄 지낸 것 같은데 상주의 수도원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담장 안에 갇힌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 일치된 길을 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물러난 봉쇄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시대에는 예수님을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힘겨운 일이라는데 심지어 예수님을 닮는 것을 넘어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그 무모한 결심과 시도는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요?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이다지 어렵건만 온갖 욕망과 번뇌, 시름과 간절함마저 다 내어놓고자 하는 원의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고즈넉한 상주 산골에서 하얗게 나이 들어가는 수도자들을 보면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며칠 전 옛 동창들의 연말 모임이 있으니 올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냉담 중인 신자 한 명을 제외하고는 가톨릭 신자는 한 명도 없는 데다 극단적 무신론자까지 포진한 그 모임에 간다는 것은 저로서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에 이번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빠지려 했습니다. 이제는 부모님도 형들도 함부로 안 부르는 제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 것도 괘씸한 ^^ 일이고 그 자리에 나가봐야 약간 이물질처럼 보는 시선도 불편하고 이야기의 주제도 마땅치 않은 일입니다.
괘씸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는 당돌한 생각! 상주 산골의 수도자들이 재속 사제인 제게 도전이 되듯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는 도전과 자극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자신이 없지만 복음은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그렇게 들립니다. ‘네까짓 것이 뭘 자꾸 준비하려 하니.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네 입술에 내 말을 담아 줄 것인데.’ 그럼에도 슬쩍 걱정이 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믿음도 없는 모양이긴 합니다. 말문이 막히면 그냥 침묵하여도 괜찮을 것을요. 말보다 더 ‘위대한 침묵’이 있음을 상주 산골에서 파르라니 머리 깎고 숨어 있는 수도자들에게 배울 수 있지 않나요. 건투를 빌어 주십시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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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사실 말하는 이 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19-20)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어제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며 즐거워했던 우리에게 오늘은 첫 순교자의 축일을 기념하며 맞이합니다. 성탄은 순교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성탄도 없다는 것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삶을 자신을 죽이는 삶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심으로 당신을 따르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3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 31- 33)는 이 말씀을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초대하십니다. 여기에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곁들여 받게 될 것에 집착하며 추구합니다. 따라서 정작 본질적인 것을 잃어버립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순교의 삶이란 바로 곁들여 받게 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는 삶입니다. 이 순서를 지키는 것이 순교자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 부분에서는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뽑으시고 그들에게 두려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선교의 현장에서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선교의 현장에서 받게 될 박해를 각오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구체적으로 뱀처럼 슬기롭고 순박한 비둘기처럼 사목의 현장에서 준비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을 조심해야 하며 예수님 당신 때문에 사람들이 임금에게 끌고 가서 증언하게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그리고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늘 알려 주십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선교의 현장에서도 적용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열둘은 하느님과 관련된 수로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 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제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사도’가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마귀를 쫓아내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신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시는 것처럼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사고나 관습을 바꾸라고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종교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종교를 전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마저도 담보해야 하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선택하시고 난 이후에 이들에게 필요한 능력과 가르침을 주신 후에 이들을 파견하십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객지로 보내는 것과 같은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은 그 장소가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박함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위험에 직면하게 될 때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 가에 대해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며 알려줍니다.
이는 인간적인 능력으로 응답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고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겠지만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음을 잊지 말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종말을 뜻할 수도 있고 ‘순교로 죽기까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종말의 구원을 뜻할 수도 있고, 순교한 다음의 영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 23)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고을에서 박해를 하면 다른 고을로 피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순교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한 방법인데 무턱대고 죽음을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분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순교는 우리 신앙의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선교의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언제나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서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순교는 신앙의 목적이 아니므로 박해하는 장소에서 박해를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우리와 우리 가족들 모두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오로지 주님께 의탁하는 삶은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지만 주님으로부터 해방되는 삶은 세상의 노예가 되는 삶을 살게 됨을 잘 알고 이를 실천하는 거룩한 하루 되시도록 기도합니다. 동시에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건석 프란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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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복음 묵상 (마태 10,17-22)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성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함께 미사를 봉헌합니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스승이신 주님을 본받아 희생된 첫 번째 순교자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명의 부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고 반대와 폭력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순간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승이신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서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며 우리도 또한 성인의 모습을 본받아 참된 사도로서의 삶으로 투신할 수 있기를 바라며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삶에 박해가 따르게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당신을 따르는 삶에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하느님, 곧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진정 특별한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곧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하느님의 힘과 도움을 통해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렵지 않고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영을 통해 우리는 참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중에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이 함께 임하시고 그를 통해 우리도 역시 참된 사도로서의 여정을 기쁘게 이루어 갈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했으면 합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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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랑의 복음을 전한 첫 열매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아드님을 지상에 파견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여러 증인들의 기념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 하신 목적,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대화에 속하는 복음은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는 스승을 본받아 희생된 첫 어린양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부제 가운데 사랑의 봉사를 위하여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반대와 폭력이 쏟아져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이들의 행렬을 이끕니다. 믿음의 영웅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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