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3-16)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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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3-16) -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1.10.1.)

by honephil 2021. 10. 1.

 

<로마 보편 전례력에 따라 2018년부터 기념일로 변경되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1873년 프랑스의 알랑송에서 태어났다.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리지외의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간 그녀는 결핵을 앓다가 1897년 24세의 젊은 나이에 선종하였다. 짧은 기간의 수도 생활이었지만 데레사 수녀는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면서 고행하였다. 일상의 단순하고 작은 일에 충실하였던 그녀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그리고 사제들, 특히 먼 지역에 가서 선교하는 사제들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선종한 뒤에 나온 데레사 수녀의 병상 저서들은 세계 각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많은 이를 감동하게 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 교황은 그녀를 시성하고, 1929년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성녀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성녀는 ‘소화(小花) 데레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14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15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16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은 도대체 무슨 일로 “불행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불행 선언’을 듣게 되었을까요?
『성경』 부록에 있는 ‘신약 시대의 팔레스티나’ 지도를 살펴보면, 코라진,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이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삼각형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 고을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고을이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처음 시작하셨던 곳이며(마태 4,13; 마르 1,21; 루카 4,31 참조), 벳사이다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마르 8,22 참조),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르셨던 동네였습니다(마르 6,45; 루카 9,10 참조). 그러한 이유로 오늘 복음인 루카 복음과 병행하는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곳들을 “예수님께서 ……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마태 11,20)이라고 알려 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활동하셨고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던 고을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구약 시대부터 수많은 임금과 예언자가 보고 싶어 하고 또 듣고 싶어 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들었으면서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내려진 ‘불행 선언’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이제 우리를 돌아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미사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바른 눈과 귀를 가지고 있는지요? 우리의 눈과 귀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불행하여라!”가 아니라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도록 우리의 눈과 귀가 오롯이 그분을 향하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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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 가는 이유: ‘행복’을 원하지 않아서>

 

   오늘 복음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한 고을은 한 사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하실 때, ‘하늘’과 상반되는 ‘저승’은 곧 지옥을 나타냅니다.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들의 운명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기쁩니까? 이 소식은 나의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의로우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내가 죽고 나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하면 기쁩니까? 오늘 저주받은 고을들도 그렇게 주저하였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는 사실 행복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은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누구나 다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틀린 것이 더 많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미 무엇이 행복인지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복음이 맛이 없는 것입니다. 술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술을 끊으면 더 행복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서전에서 평생 122명의 여인과 잠자리를 하였다고 말해 전 세계에서 유명하게 회자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바로 ‘카사노바’입니다.

 

그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혹은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난 남자다.”라는 등의 말을 남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배우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키도 크고 외모도 출중한 동시에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특히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입니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합니다.

 

    그가 서품 준비에 한창이던 때 일흔 나이의 사제 말리피에로가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것을 봅니다. 혼란스러운 그도 백작의 딸인 루시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납니다. 하지만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립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그 후 여러명의 여자와 특별히 높은 신분의 여자들과의 관계로 그는 성직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 이후로 평생 여기저기를 도망 다니며 많은 여자를 꾀고 돈을 위해 사기를 치고 다니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평생 도망치며 감옥을 들락거리고 세상을 떠돌다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지만 한 여자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채 73세의 나이로 외롭게 세상을 떠납니다.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3개월입니다. 사실 그는 문란한 생활 때문에 성병에 자주 걸려 40대 중반부터는 성기능 장애가 오기도 했습니다.

 

    천재로 태어나 성직자의 길을 택하여 위대한 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수 있었던 그는 결국 자신이 믿는 행복을 찾아 떠났고, 그렇게 자신이 원한 자유로운 떠돌이 생활을 하다 외롭게 죽었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습니다. 천재였지만 실제로 이룩한 업적은 하나도 없고, 돈으로 여자의 성을 착취한 호색한이며, 그 돈을 벌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사기를 치던 정말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았다는 평가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렇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그리스도인으로 죽는다.”

 

    카사노바는 분명 그리스도를 택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행복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느님이십니다. 이 정도는 그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여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행복이라고 믿는 철학을 추구한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살면서 결국 돈도, 명예도, 성도 나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행복은 돈이다.”, 혹은 “행복은 명예다.”라는 식으로 결정해 버리면 참 행복이 왔을 때는 그것을 밀쳐내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이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외면하던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그래, 그럼 그 손을 놓아라.”

    “당신 말고 다른 분은 안 계시는가요?”

 

    위의 사람은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도 행복을 원하는지, 행복에 대한 내 생각이 맞기를 원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하느님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하느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지 하느님만 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살아야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당신 자신이기 때문에 나를 버리고 당신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지 않고 이미 그 행복을 인간의 수준으로 규정하여 복음을 밀쳐내면 오늘 저주받은 마을들의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https://youtu.be/hgmS8pJIaTg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루카 10.16

Whoever listens to you

listens to me.

Lk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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