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02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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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021.5.29)

by honephil 2021. 5. 29.

오늘은 우리나라의 124위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로,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 되던 분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성대하게 지내기로 하였으며(기원 1),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24-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가는 씨앗’을 통하여 추수철에 많은 결실을 내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마태 13,3-9; 마르 4,3-9 등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를 부활과 영원한 행복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35-44 참조).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목숨을 바쳐 많은 이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과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말한 대로 ‘교회의 씨앗’ 임이 틀림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온갖 회유와 궤변에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5월 29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 하느님을 결코 배신할 수 없음을 담대하게 밝히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루카 21,15)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이 세상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시다.

신우식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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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흐름상 복음 묵상은 연중 제8주간 토요일로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다음 유다 지도자들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 거냐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은 분명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하나를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다고 하면 그가 증언한 당신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할 것을 알고 또 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면 군중에게 욕을 먹을 것 같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당신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인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를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냉혹하다시피 대하십니다.

 

    자녀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사랑이고 자녀를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많은 부모들은 많은 경우에 자녀들을 끝까지 자신의 품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도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없고 그렇다면 아기가 부모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듯 그 요구를 들어주다가 부모는 피가 마르고 맙니다.

 

    박애희 작가의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떠나간다』의 ‘모든 것을 주면 떠나버리는 사랑의 슬픈 법칙’이란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부모와 자녀의 이상한 법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님이 오른편 맨 앞자리에 앉아계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분은 같은 동네에 사는지 무척 가까워 보였다.

 

    “어무니, 그래서 결국 준겨?”

 

    “아니, 그럼 어떻게? 죽는소리를 하는데!”

 

    “아이고, 내가 안 된다고 했잖여. 봐봐. 이제 아드님이 찾아오는지.”

 

    “그러게. 나도 영 안 돼 보이긴 해서 주긴 했는데, 이젠 통 연락이 없더라고.”

 

    “그게, 그런 거여. 어무니. 부모는 돈이 힘이여! 그걸 미리 다 줘버리면 부모를 잊는다니까!”

 

    “그래도, 갸가 마음은 여려.”

 

    “아니, 마음이 여린데 어머니 돈 다 가져가 버린대?”

 

    “지 사는 게 영 마뜩치 않으니까 그런 거지 뭐. 아니, 이번 한 번 만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안 줘.”

 

    “아이고, 어무니도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다 쓴데? 아니, 지난번엔 첫째한테도 다 퍼줬으면서….”

 

    “어떻게 안 줘? 자식 앞에서 모진 부모가 어딨게? 아, 그라고 이제는 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어.”

 

    “아휴, 어머니가 우리 엄니였으면 좋컸네유. 아참 어머니 병원 가시는 길이라고 했죠? 무릎은 어떠신겨?”

 

    [출처: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J’]

 

    대화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은 다 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다니는 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돈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부모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자녀를 아직도 품에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품에 안긴 자식은 ‘모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세상에서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정서적으로 독립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똑같은 ‘어른’으로 대해야 합니다. 돈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이면 부모는 자녀에게 유산까지 주고 모든 관계를 청산합니다. 자녀를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청하는 유다인들에게 ‘No!’ 하십니다. 당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취급은 어린이 때면 충분합니다. 어른 취급을 할 때 자녀도 부모를 어른으로 대하게 됩니다.

 

    결국,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독립시키지 않은 부모는 어떻게 될까요? 계속 젖을 찾고 젖이 나오지 않으면 젖꼭지를 물어버리는 아이처럼 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주다가 죽는 것이 부모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녀에게 좋지 않습니다. 자녀를 영원한 어린이로 만들어버리고 결국엔 다 주어도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한 에피소드를 읽어봅시다.

 

    이 책의 작가인 김새별은 고독사나 자살 등으로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작업절차를 채 설명하기도 전에 유족들은 우르르 안방으로 몰려갔다. 장롱문을 열어젖혀 이불 사이를 뒤지고 서랍을 빼내어 바닥에 뒤엎었다. 남자 여자 총 다섯 명,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고인의 딸과 사위, 아들인 듯했다. 무슨 유서를 저리 요란하게 찾는 건가 했는데, 집문서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다 숨겨놓은 거야?”

 

    “금반지랑 금두꺼비도 있다더니 없는데?”

 

안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가족들은 나머지 방과 거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달해줄 것을, 가족들은 집 안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으며 청소만 어렵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의뢰인이고 소중한 고객이지만, 저런 사람들을 위해 청소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찌는 듯한 여름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그렇게 삼십 분이 넘게 지났을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웃들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작업을 마쳐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침 가족들이 나오는 참이었다. 원하는 것을 못 찾았는지 얼굴들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첫째 사위인 듯한 이가 물건이 나오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이었다. 앨범, 휴대전화, 신분증, 각종 서류, 통장, 현금, 귀중품 등은 요청하지 않아도 확실히 전달한다.

 

    가족들이 어지럽혀놓은 통에 집 안은 더욱 정신이 없었다. 구역을 나눠 인원을 배정하고 유품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유품을 담은 박스들을 차량에 실으라고 지시한 후, 정리 중에 나온 앨범과 사진 액자를 닦았다. 전해주기 위해 나가 보니 아파트 입구 쪽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물건은 없고 이것만 나왔습니다.”

 

    딸이 실망한 얼굴로 액자와 앨범을 받아들었다. 순간, 아들이 그것을 냅다 빼앗아들더니 한쪽에 세워두었던 우리 차량 적재함으로 집어던졌다.

 

    “냄새도 심한 걸 뭐하러 가지고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액자 유리가 깨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꺼림칙하다면 사진만 빼서 간직해도 될 것을. 나는 적재함으로 뛰어올라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사진만 빼내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고는 사진을 빼기 위해 액자 뒷면을 떼어냈다. 그 순간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현금과 봉투였다. 액자 안의 스티로폼 중간 부분을 잘라내고 넣어놓은 것이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적재함 바닥으로 쏠렸다. 아들이 뛰어왔다. 돈과 봉투를 주워 들고 막 건네려는데 아들이 휙 낚아채 갔다.

 

    가족들이 모두 다가오고, 아들은 돈을 세기 시작했다. 오백만 원이라고 했다. 봉투에는 집문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것만이라도 간직하시죠.”

 

    아들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마지못해 받아 들었다. 그에게는 집문서와 현금만이 중요했다. 그 돈은 장례비용이었으리라. 죽는 순간까지 남겨진 자식들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다. 부모의 사진을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현금과 집문서를 액자에 넣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고인의 사진을 더도 덜도 아니게 쓰레기 취급했다.

 

    아버지가 홀로 살다 돌아가시고 스무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는데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았다. 고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도 자식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였다. 이런 경우 조금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초에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가족들은 가슴 아파한다. 그런 가족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과연 위로가 될까 회의하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가슴 아파하는 가족도 없었고 그러니 위로의 말을 건넬 필요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이 있어서 고인이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 것인가. 보는 이의 마음이야 어떻든 원하는 것을 얻은 가족들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총총히 사라졌다. 나만이 쓸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부모가 자녀를 끝까지 자신의 자녀로 품고 있으려고 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주님께 봉헌하거나, 적어도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독립적인 존재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결국 부모를 이렇게 대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에게 피를 빨릴 존재이고 더는 피가 나오지 않으면 버려질 존재일 뿐입니다.

 

    자녀가 모기의 본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과 같은 동등한 존재, “네가 말 안 하면 나도 안 해!”라는 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녀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끝까지 부모를 자기가 아기였을 때처럼 대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셨고, 예수님도 당신을 찾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결국 자녀가 부모 또한 자신과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인데 자신을 무상으로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https://youtu.be/lCWHPfjNjRA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21.5.29)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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