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 10,34─11,1)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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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 10,34─11,1)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1.7.12.)

by honephil 2021. 7. 12.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아침에 눈을 뜨며 ‘5분만 더 잘까?’ 하는 고민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성경을 보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쓸까 고민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토론하고 고민합니다. 온종일 우리는 고민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한 고민은 대개 나 자신이 좀 더 편하려는, 더 쉽게 살아가려는,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는 싸움이며, 곧 유혹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내놓기 위한, 남들보다 더 힘들어지는 고민과 갈등은 대부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평화를 위한 이기적인 고민을 먼저 하다 보면 예수님의 가치와 시선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고민 없이,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실행에 옮깁니다. 나아가 그러한 고민이 없는 삶을 평화라 여기며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평화는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힘으로 누르는 평화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거대한 힘 앞에서 두렵고 무서워 타협이라는 명목으로 도망치고 비굴해지는 평화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고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에게 ‘칼’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을 날카롭게 찌르며 고통을 줍니다. 때로는 그 고민의 칼 때문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도 하고, 의견이 달라 대립하며 갈라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하며 우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감당하기 힘들지만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그 끝에 더 큰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때로 그 십자가의 무게가 고민의 칼로 다가올 때는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신 길의 끝이 죽음이 아닌 부활이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지만, 오늘도 묵묵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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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 그릇의 크기는 어떻게 성장하는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만약 대학에서 강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교수들만큼이나 클 수밖에 없습니다. 교수들을 다 담을 그릇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보석을 감정할 수 있다면 보석의 가치를 넘어선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없다면 그 보석은 그냥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릇의 크기입니다. 각자는 각자의 그릇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가 다섯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두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 혹은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인지가 내 그릇 크기에 달린 것이고 그만큼 주님께 받는 상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나의 그릇 크기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요?

 

    BTS 신곡 ‘버터’(Butter)가 발표되자마자 미국 빌보드 싱글 순위 6주 연속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BTS가 속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방시혁이란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박진영과 함께 JYP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으나 왠지 그와 잘 맞지는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박진영이 ‘원더걸스’를 미국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가수들을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2019년 서울대 졸업 축사에서 보면 그는 가수들을 매우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수들이 자신들이 속한 회사를 위해 그렇게 혹사당하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그가 ‘분노’로 성공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이 분노는 왜 생기는 것일까요? 나의 밥그릇에 밥알이 하나나 두 개만 담기면 화가 나지 않을까요? 그는 무언 지는 모르지만 큰 그릇이었기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노의 목적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가수들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도 불만이었던 것인지 그의 멤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남이 만들어 그대로 그 틀에 맞추는 음악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와 리듬, 퍼포먼스를 최대한 살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는 특별히 ‘알엠’(RM)이란 리더를 알아보았고 그를 중심으로 멤버를 모았으며 ‘뷔’(V)라는 멤버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데뷔 직전까지 그의 존재를 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을 모으고 키운 데는 방시혁이 재능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었음을 무시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듯 자신이 성장하려면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과 그 사람들을 한 데에 모아 훌륭한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사람이 요리도 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요리는 재료를 잘 고를 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나의 가치는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는 것들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제가 평가하는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BTS를 통해 방시혁이란 인물의 가치가 세계에서도 인정받게 된 원인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방시혁 씨가 요리사라면 그는 그 요리를 통해 많은 이가 행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재료도 행복하고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함의 기대치가 커서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분노하였습니다. 내가 만드는 요리가 더 맛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기쁘게 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분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재료로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었을 때 자신의 행복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는 꿈이 없고 그날그날 그냥 살았다고 합니다. 만약에 그가 꿈이 있었다면 요리는 행복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도 행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꿈은 그저 행복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요리가 잘 되어 요리 자체도 행복해하고 또 그것을 먹는 이들도 행복해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그 행복의 욕망이 컸기 때문에 그는 그릇도 큰 사람이 된 것입니다.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 분명 분노가 생겨납니다. 분명 지금의 시스템이 그 목표를 방해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다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 분노가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분노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만들어진 음식과 그것을 먹을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시스템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성전의 사람들을 내쫓은 것이 그런 분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그릇의 크기는 내가 얼마만큼 그 받아들인 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가에 달려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만들어줄 더 큰 예언자들을 내 그릇에 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도 받게 될 것입니다. BTS는 방시혁의 예언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받는 상을 함께 누립니다. BTS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하지만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습니다.

 

    영화 ‘식객’에서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순종에게 대령숙수가 음식을 해 바쳤고 그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합니다. 그 음식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그 대령숙수의 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음식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음식인 ‘육개장’이었습니다.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이 탕에는 조선의 모든 것이 담겨있습니다. 평생 묵묵히 밭을 가는 소는 조선의 민초요, 고추기름에는 맵고 강한 조선인의 기세가, 어떤 병충해도 이겨내는 토란대에는 외세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고사리에는 들풀처럼 번지는 생명력이 담겨있습니다. 나라를 잃고 상심한 임금에게 대령숙수는 조선의 정신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강론이나 유튜브 강의 등은 여러분들이 받아들이는 예언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것들로 요리를 해서 누군가를 구원하여 행복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더 좋은 요리들을 만들려고 더 좋은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그 예언자들이 받을 상을 여러분들이 다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할 꿈을 꿉시다. 그것이 분노하게 만들겠지만 결국 그 분노가 여러분 행복의 그릇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https://youtu.be/Hp8pjztwXN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오 10,34─11,1) -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2021.7.12.)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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