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5,43-48) - 사순 제1주간 토요일(20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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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5,43-48) - 사순 제1주간 토요일(2021.2.27.)

by honephil 2021. 2. 27.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주님의 규정과 법규를 따르고 실천하면 하느님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신명기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상선벌악의 가르침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하고 살아가려면 많은 희생이 요구되지요. 나만 바보가 되는 것 같은 모습에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니지요. 주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을 일삼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에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이 세상에서 드러나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이 세상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가 자비가 넘치는 세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과 선인을 동등하게 대우해 주십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당신의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비를 내려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심판으로 가득하고 하느님의 자비가 없는 곳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만 해를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모습에 우리는 속상한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러나 공정과 정의는 우리가 훗날 맞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지금은 공정과 정의보다 하느님의 자비가 더 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가 가득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길은 지금 이곳에서 주님의 계명과 가르침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면서 시작됩니다. 그 길이 지금 우리의 눈에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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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려면: 그리스도가 되어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불가능해 보이는 계명을 주십니다. 하지만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시며 우리 의무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씨가 자신의 외아들을 납치해 살해한 원수를 용서하러 가서 더 상처를 받고 돌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용서하러 갔는데 범인은 이미 예수님께 용서를 받아 마음의 평화를 찾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범인을 위해 또 용서를 해 줄 수 있을까요? 전도연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힘든 사람이 자신이고 그것을 이길 수 없어 칼로 자해를 합니다.

 

      정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까지 나보다 더 행복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바로 전에 동료 미술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복수할 생각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모습을 그려 넣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리옷 유다의 얼굴에 그 동료의 얼굴을 넣음으로써 그림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가 경멸의 대상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얼굴이 다빈치와 싸운 사람의 모습임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작업에 진전이 없었습니다. 동료에 대한 미움이 예수님 얼굴을 그리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빈치는 즉시 유다의 얼굴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선 예수님의 얼굴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성당 성가대에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은 남성 성가대원을 발견하곤 환호했습니다. 그는 젊고, 건강하고, 활기찼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 청년을 자신의 화실에 초대하였고 그를 모델로 삼아 그렸습니다.

 

      이젠 유다의 얼굴을 다시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찾기 어려웠습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그림을 의뢰한 수도회 측에서는 속히 작품을 마무리하라고 압박하였습니다.

 

      다빈치는 거리를 다니며 작품 속 유다의 얼굴을 찾았습니다. 몇 날 며칠을 고생한 후, 레오나르도는 참 슬프고, 외롭고, 술에 취해 있고, 현세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져 사는 듯한 한 젊은이를 찾았습니다. 그를 초대하여 유다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다빈치가 자신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그 젊은이가 작품을 보며 소리쳤습니다.

 

“앗! 이 그림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는데!”

 

다빈치는 놀라서 젊은이에게 언제 이 그림을 보았냐고 물었습니다.

 

“3년 전에요. 제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잃기 전에요. 그땐 전 성가대에서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어요. 꿈도 많았었지요. 어느 화가분이 저를 초대해 예수님 얼굴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었어요.”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얼굴, 즉 두 얼굴의 주인공인 것이죠.

 

      위 이야기는 실화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우리에게 묵상 거리를 던져줍니다. 처음에 다 빈치는 미운 동료를 먼저 그렸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얼굴에 갇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을 그리니 이젠 유다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마음엔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보는 나쁜 사람들은 모조리 ‘상처 받은 예수님’의 모습일 뿐입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부처만 돼지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돼지는 부처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에 자기 미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가능하다고 믿어야 기도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개는 꽃이 예쁜 줄 모릅니다. 인간이 되어야 꽃이 예쁜 줄 알고 사람을 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덜 예쁜 사람이 있다면 예뻐지도록 기도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꽃이 되기를 바랄 때 그 사람은 이미 꽃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개나 돼지는 꽃을 볼 수 없기에 자신은 물론이요, 남을 위해서도 아름답게 되도록 바라거나 기도해 줄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려면 먼저 유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당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다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십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까지도 자신의 모습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돼지이고 바리사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시선을 가지려면 내가 먼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겸손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그리스도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는 길은 아버지를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길밖에는 원수까지 사랑할 방법이 없습니다.

https://youtu.be/EXYrjkjZidc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늘의 너희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5,43-48 ) - 사순 제1주간 토요일(2021.2.27.)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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