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32) - 사순 제1주간 수요일(202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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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32) - 사순 제1주간 수요일(2021.2.24.)

by honephil 2021. 2. 24.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구약 성경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자신의 이름으로 예언서를 가지고 있는 예언자는 모두 열다섯 명입니다(히브리어 성경 기준으로, 우리 성경의 애가, 바룩서, 다니엘서는 제외됩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한 명의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요나 예언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 민족인 니네베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요나가 큰 도시 니네베에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임금부터 모든 백성이,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자루 옷을 걸치고 회개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고 예고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의 회개가 하느님의 마음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요나보다 더 큰 이”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럼 이제 주님의 자기소개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물어봅시다. 예수님을 요나보다 더 크신 분으로 생각하나요? “예!”라는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어 봅니다.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님을, 요나보다 솔로몬보다 위대하신 분을 만나고 있나요? 이 질문에 우리가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미사는 은총이 가득한 시간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성인보다, 성경의 인물보다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분께서 바로 미사 안에서, 그리고 일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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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란 어린이처럼 되는 것>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믿으려 하지 않는 군중들을 질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을 믿지 못하고 표징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하십니다.

 

기적이나 표징은 분명히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수 있고 심지어 믿음까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보다 더 깊은 심연에 있는 것이 ‘원의’(原意)입니다.

 

      원의는 기본적으로 내가 행복이라고 믿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행복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표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분을 믿으면 지금의 행복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무엇이 행복인지 정하는 ‘회개’가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리 표징을 주어도 그 표징으로 생긴 믿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회개해야 복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수녀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유교입니다.”

 

예순두 살의 교육감 출신의 한 형제는 베드로 수녀님이 병실을 방문할 때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8남매 중 둘째인 이분은 교육감을 지냈고 집안의 기둥이었습니다. 셋째 베드로 형제만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셋째의 부탁으로 수녀님이 매일 병실을 방문했지만 둘째 형님은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믿음을 고수하려 했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부모님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상놈들의 집단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수녀님이 천주교에서도 제사를 지낸다고 말은 했지만, 그 시각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베드로 형제는 형님이 죽기 전에는 대세를 절대 받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수녀님께 임종 전 조건부 대세를 드리자고 청했습니다. 드디어 임종의 시간이 찾아왔고 온 가족이 모여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형제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수녀님은 지금 행하는 예식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조건부 대세를 드렸습니다. 베드로 형제는 예식이 너무 길어서 그 전에 형님이 돌아가실까 봐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다행히 다른 형제들도 마지막 예식이니 그냥 따라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 형제 가족과 주님의 기도 성모송을 다 바쳐갈 때쯤이었습니다. 의식이 없던 요한 형제가 갑자기 눈을 뜨고 수녀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형제가 놀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이고 형님 깨어나면 안 되는데! 우리 형님 죽어야지 세례받는데…. 어떡해요, 수녀님?”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입니다. 형님 성격에 자기 허락도 없이 대세 주었다는 것을 알면 동생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형제는 수녀님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수녀님. 제가 유교에서 죽고, 천주교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요한 형제는 건강이 날로 좋아졌고 어차피 대세를 받았으니 교리를 받고 정식 세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에게 “내가 천주교 신자로 살아났으니, 너희도 다 믿어라! 주일은 모두 다 성당에 가라!”라고 명했습니다. 요한 형제는 그 이후 12년 더 가족과 함께 지내며 모든 동생 가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도왔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비움]

 

      이런 사례로 볼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은 과연 어떤 기적이나 표징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냥 마음만 바꾸면 됩니다. 요한 형제는 자신이 유교를 믿으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을 행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면 자신의 행복을 더 들어 높였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 제사도 지내며 세례도 받고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은총의 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행복의 개념이 바뀐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은 표징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의 결심으로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 결심은 내가 무엇이 행복이냐고 믿는 것에 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보고 남방 여왕이 그 먼 여행을 하며 찾아왔고, 또한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던 사례를 드십니다.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악한 세대와 달랐던 것은 ‘변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분명 더 큰 행복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 희망이 무엇이라도 찾게 했습니다. 먼 여행을 통해 솔로몬의 지혜를 배웠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요나의 설교대로 회개했습니다.

 

      이렇듯 찾고자만 하면 저절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옵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길을 마련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으려는 마음만 있다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먼저 믿음이 적은 이유를 찾기보다 정말 믿기를 원하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믿어서 손해 나는 것이 아까우면 영원히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의 나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러워야 주님을 믿게 됩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잘 압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압니다. 어린이처럼 원할 줄만 안다면 우리가 믿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아는데 어른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로 사는 것이 고통이고 부모에게 순종하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는 하느님 아버지와 성모 어머니입니다.

https://youtu.be/DmneZwVasN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1,29-32 ) - 사순 제1주간 수요일(2021.2.2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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