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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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0.9.30)

by honephil 2020. 9. 30.

[묵상]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2020.9.30)

예로니모 성인은 340년 무렵 크로아티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로마에서 라틴말과 그리스 말을 깊이 공부한 뒤 정부 관리로도 일했으나,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사막에서 오랫동안 은수 생활을 하며 히브리 말을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사제가 된 그는 다마소 1세 교황의 비서로 일하면서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라틴 말로 번역하였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이라고 하는 『불가타(Vulgata) 성경』이 그것이다. 또한 성경 주해서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 저술을 남기고 420년 무렵 선종한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성인, 그레고리오 성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함께 서방 교회의 4대 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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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제목은 우리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당히 십자가를 지셨고 수많은 성인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소명은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https://youtu.be/ysxiUVN0fZk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9.3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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