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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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참으로 성공한 인생은 무엇일까요? 하느님 눈에 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크게 되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신 다음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크기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시는 유일한 기준은 ‘겸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아는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이 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만하면 사랑을 할 수 없으니 겸손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까지도 잘 받아들이기에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가장 크시지만 가장 작은 밀떡 안에 계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들 안에 계십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어떤 초등학교에서 정신적으로 조금 모자란 랄프라는 아이는 성탄 연극 때 여관 주인 역할을 하며 오갈 데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가장 작은 이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태중에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은 또 하느님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그는 하늘만큼 큰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도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에게서도 단점을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특권의식을 내세우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에서 벗어나려면 나의 단점들을 극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 단점이 있으니 남의 단점도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도 기억하는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버스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어머니와 저는 서서 있었습니다. 한 정류장에서 앉아있던 사람이 내리자 어머니는 재빨리 그 자리로 뛰어가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앉을자리에 저도 앉으라고 손짓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그 자리를 맡으려고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창피해서 어머니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상도 찌푸렸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내려서 매우 서운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온종일 저 때문에 뛰어다녀서 몹시 지쳐있었는데, 어머니보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저는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특권의식을 지키려 어머니에게 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나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 어머니의 단점을 나의 것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받아들이면 나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남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나의 단점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나이 들며 유일하게 신경 써야 하는 것은 남의 단점들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어렸을 때 길을 잃어 고아로 크며 남의집살이하며 고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혹은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그냥 보지 못하십니다. 저희 집에는 이미 쓴 물건들이 많이 쌓여있고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어머니에게 혼이 납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흘려보내 주는 것을 배운다면 더욱 좋겠지만 지금처럼 사시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훌륭해 보이십니다.
저희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한 아이를 집에 들여 씻겨주고 재워주고 좋은 옷을 주시고 당분간 머물게 하신 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서 당신의 모습을 발견하셨기 때문입니다.
포용력이란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익은 사람이 자신의 옛 모습을 가진 이들을 이전의 자신처럼 대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익어간다는 뜻일 것입니다. 남의 단점을 판단하지 않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그 단점을 극복했어야 합니다.
쭉정이는 자신도 곡식이라는 것을 뽐내기 위해 익지 못한 것들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미 익은 곡식은 새싹이든, 자라고 있든, 속이 아직 차지 않은 쭉정이든, 자신이 그런 적이 있어서 언젠가는 가득 차게 될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미 익은 곡식은 익지 않은 다른 것들도 자신처럼 곡식으로 봅니다. 부족한 이들도 모두 자기 자신처럼 보는 것입니다.
나이 들며 더욱 포용력이 향상되는 이유는 그만큼 이전의 단점들에서 벗어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산도 벗어나야 볼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남의 단점이 나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단점을 내가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낮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넓은 마음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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