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하신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는 날이다. 자식의 아픔은 어머니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시메온은 성모님의 그 고통을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 때 이 기념일이 정해졌다. 1908년 비오 10세 교황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 날인 9월 15일로 기념일을 옮겨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과 연계하여 기억하도록 하였다.
<아들 수난 보는 성모 맘 저미는 아픔 속에 하염없이 우시네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부속가).>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27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자식의 죽음 앞에 심장이 터지고 허파가 뒤집히지 않을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제자를 두고 당신의 어머니와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심정 역시 떠나가는 이의 진한 아쉬움을 담아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서로에 대한 사무친 사랑의 절정에 교회는 그 시작을 알립니다.
갈수록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리는 세상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저 하나의 목숨을 유지하고자 세상은 사활을 건 전쟁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죽어 가는 세상에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기억하고 일으켜 세우는 일이 교회의 일이라는 사실도, 꽤 오래전부터 죽어 왔음을 부인할 길이 없습니다. 수많은 신심 활동과 사목 프로그램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며, 신앙이 결국 교회의 담장을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미사를 마칠 때마다 곱씹어 봅니다. 미사는 파견입니다. 미사는 세상살이를 위한 준비고 다짐이며, 그 미사 속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당신을 내어 바치십니다. 세상에 이 한 몸 살라 바쳐 세상이 새로운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미사를 마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나가는 이웃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도 좋고, 가끔은 원수 같이 보이는 남편이나 부인에게 살뜰한 애교 섞인 말을 건네도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목숨 바치시어 돌아가시는데, 그 정도도 못하면서 미사 시간에 거룩히 앉아 복음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것은, 참 민망한 일이겠지요. 신앙은 세상 끝까지 뻗어 나가는 속성을 지닌 생물이지 멋진 어항에 갇혀 있는 관상어가 아닙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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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을 때만 의미 있다>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어지는 기념일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고통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모 마리아가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는 고통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공로가 되느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십자가 아래 있는 어머니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에 어머니가 되기 위한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그저 아들이 공공의 적으로 몰려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것 때문에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교회라는 새로운 자녀를 낳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마리아들도 십자가 아래 있었지만 성모님 고통만이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통에 당신 고통을 합칠 줄 아는 어머니의 공로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무슨 고통인지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아기를 낳는 것도 동시에 포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그 의미를 알 때야만 창조의 도구가 됩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당하시는 고통이 교회를 낳는 창조사업을 위해 반드시 감수해야 하는 고통임을 아셨습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침대에서 떨어진 남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검사를 받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간호사들이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침대에 누가 시체의 다리를 잘라서 가져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왼쪽 다리의 신경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입원 치료 중이었는데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남의 다리가 만져진 것입니다. 깜짝 놀라 그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다리는 자기 다리였습니다. 올리버 색스 박사는 당혹스러워하는 그 사람에게 “그럼 당신의 왼쪽 다리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안색이 창백해지며 “모르겠어요. 전혀 모르겠어요. 사라져 버렸어요. 그냥 없어져 버렸다고요.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는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자신의 왼발로 오는 마비 증상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고통이 자기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고통이 있는 자기 다리도 함께 집어 던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고통을 거부하셨다면, 그 고통을 피하려 하셨다면 십자가 밑에서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는 말씀은 들으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고통의 의미를 아셨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같은 책에 「수평으로」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93세 노인의 사례가 나옵니다. 그분은 걸을 때 몸이 10도 정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자칫 넘어질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달팽이관의 수평을 유지하는 부분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그 노인에게 그렇게 몸이 기울어져서 걷는다는 것을 알아듣게 설득하는 일이 어려웠습니다. 자신은 정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영상을 찍어 보여주자 수긍하였습니다. 만약 위의 사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이렇게 걷다가 죽을래요.”
그러나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목수였다며 어떠한 건축물이 평평한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수준기’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나무나 콘크리트 위에 그 수준기를 놓으면 그 건축물이 기울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 머리에 있는 그 수준기가 고장 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평평한 선이 있는 안경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안경을 통해 밖을 볼 때 평평한 선이 그어있으면 자신이 그것을 보며 비뚜로 걷는지 올바로 걷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경에다 그 선을 만들었더니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경 앞으로 조금 나오게 그 작은 수준기를 달았습니다. 수준기를 보랴, 앞을 보랴 처음엔 매우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뒤에는 능숙하게 걸으며 자신의 자세를 꼿꼿이 피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안경은 여러 어려움으로 수평으로 걷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좋은 발명품이 되었습니다.
고통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때, 90세가 넘어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창조의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나에게서 던져내려고만 한다면 결국 그 고통과 하나가 된 나 자신도 침대 밖으로 던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고통은 내가 유익하고 의미 있어 잘 받아들일 때만 나에게 그 의미를 주고 창조의 계기가 됩니다. 성모 마리아는 당신께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 있게 여겨서 그것을 교회를 낳는 새로운 창조의 계기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앞으로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당연히 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위해 주시는 의미 있는 고통임을 믿는 것입니다. 고통은 의미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열매를 선물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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