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20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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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2020.9.14.)

by honephil 2020. 9. 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려고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고자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 경배는 널리 전파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이 축일이 고정되었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고통과 슬픔의 상징인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구약의 구리 뱀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특효약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에 불 뱀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간청으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고자 구리 뱀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요한복음에서 구리 뱀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이상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삶의 고통과 슬픔을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얼른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과 슬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영광과 기쁨 속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즐거이 함께하셔야 한다는 강박이 신앙을 괴이한 처세의 도구로 타락시키고 맙니다.

요한복음이 쓰인 당시 교회 공동체는 늘 박해의 위협 속에 살아갔습니다. 얼른 박해가 끝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의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을까요. 그러한 공동체에 요한복음은, 세상의 구원은 십자가의 희생, 바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나의 자그마한 희생 안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거기에 참된 행복과 영광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요한복음은 짚어 냅니다. 지금을 불평하는 것은 지금을 죽이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서로 나누고 토닥이고 보듬어 주는 것은 지금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마저 함께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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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은 숙련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매달아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현양 축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현양하고 감사하는 날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겠으나, 내가 어떠한 십자가를 매고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만 보며 나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면 그것만큼 십자가 현양 축일과 어긋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이유는 불뱀에 물린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치유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장대에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뱀에 물려 죽어갈 때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구리뱀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모세는 구약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셨듯이, 모세도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자신을 죽여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자아라는 불뱀에 물렸더라도 모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은 다시 살았습니다. 구원은 자기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워 와서 우리 자신을 매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지금 불만 가득한 나의 자아를 죽이는 나만의 도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매달면 이제 자아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가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도구들이 모두 십자가가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아내의 머리를 자신의 모자라고 착각한 사람이 나옵니다. 유명한 성악가로서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내의 머리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도 자아에 지배당하면 사람을 물건처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바로 노래가 십자가입니다.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살려면 쉼 없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원인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몸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도 손이 있고 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어떤 수술을 받고 나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 것이 아니고 자신은 몸이 없는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눈으로 손과 발이 있음을 확인하고 머리로 명령을 내려야 그것이 움직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자아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일일이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몸을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 버린 몸의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각자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이기는데 사용하는 무기들이 다 똑같지만은 않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대를 이용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용하셨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어떤 장수는 창으로, 어떤 장수는 칼로, 어떤 장수는 표창으로, 또 어떤 고수는 부러진 칼에 줄을 매달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관우, 장비, 여포의 무기는 모두 창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비는 쌍칼을 휘둘렀습니다. 몸이 창을 쓰기에는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는 마더 데레사가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무기를 쓰면 안 됩니다. 각자의 삶에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면 그 무기로 싸우면 누구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숙련시켜야 합니다. 그 무기로 누구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무기를 찾고 연습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호흡과 이명을 이용합니다. 특히 이명이라는 저를 괴롭히는 질환을 이용합니다. 자아에 휩쓸려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이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명을 의식하면 들립니다. 그리고 이명이 들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려 합니다.

 

이명이 생기면 이명을 안 들리게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는 그것을 오히려 저의 무기로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각자의 십자가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자아를 이길 때, 다른 이들이 그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로 현양 하는 삶입니다.

 

https://youtu.be/9TdcODbkgto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9.14.)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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