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0-26
그때에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루카 복음에 나타나는 행복 선언은 마태오의 것과 달리 네 개로 요약되고, 네 개의 불행 선언이 곁들여집니다. 행복과 불행을 대립시켜 서로의 의미를 더욱 강하게 묘사하는 문학적 형식은 루카 복음의 전형적인 서술 방법이기도 하지요.
행복에 대한 수많은 담론 가운데 프랑스 리옹 국립대학의 교수인 미셸 포쉐의 담론이 제게는 가장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는 행복을 ‘회개’(또는 개종)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회개’라는 말마디의 본디 뜻은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을 가리키는데, 반목하고 갈라진 것을 서로 이어 주는 것이 회개이고 개종이겠지요. 루카 복음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도 바로 회개입니다. 사회적 통념으로 내쳐진 이들에게 굳이 더 가까이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자주 묘사하고 그런 예수님을 못마땅해하는 이들, 곧 제 잇속을 챙기며 사회적 책임에 무감각한 이들을 고발하는 것이 루카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을 다시 찬찬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행복은 배고픈 이들에게 주어지고 불행은 이미 배부른 이들을 향하여 있습니다. 행복하려면 부족함을 되새기고 간직해야 합니다. 행복은 충족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쉬워서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는 데서 가능합니다. 다만 그 아쉬움을 자신의 노력 부족이나 능력의 한계라는 순전히 개인적 책임으로 묻지 않고 서로에 대한 책임과 친교로 메꾸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느냐는 것입니다. 행복은 서로를 향한 회개여야 합니다. 행복은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화해와 사랑의 열매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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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이유>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행복은 감사한 마음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감사할 수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이것을 잘 알아서 오프라 윈프리는 매일 저녁 감사일기를 썼습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것이 법칙이기 때문에 감사하는 자에게 더 감사할 일이 많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렇게 행복해지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려고 한다고 해서 잘 될까요? 처음 감사일기를 써 보라고 하면 매우 힘들어합니다. 하루 다섯 가지, 세 가지도 찾기 어려워합니다. 그리고 얼마간 쓰다가 포기해버립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또 불만 쌓인 삶으로 돌아갑니다.
왜 감사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을 물어뜯고 있는 늑대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모기가 무는데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감사를 찾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정환 선생의 일화입니다. 어느 날 그가 밤이 늦도록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더니 복면을 한 강도가 불쑥 들어와 시퍼런 칼을 들이밀며 말했습니다.
“꼼짝 말고 손들어!”
그러자 방 선생이 말했습니다.
“아니, 꼼짝 않고 어떻게 손을 든단 말이오?”
강도가 주춤하며 말을 바꾸었습니다.
“그럼, 손들고 꼼짝 말아. 그리고 더 이상 잔소리 말고 돈이나 내놔. 그렇지 않으면 죽여 버릴 거야.”
방 선생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일어나 책상 서랍을 열고 390원을 내놓았습니다. 옛날 돈 390원이면 큰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것이 전부이니 가지고 가시오.”
주인이 태연하게 돈을 주자 도둑이 점점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려고 돌아서는데 이번에는 방 선생이 소리를 쳤습니다.
“여보시오. 돈을 주었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니오?”
깜짝 놀란 이 강도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 ○○야!”
얼마 후 날이 밝았습니다. 누가 문을 두드려서 나가 보니까 강도와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찾아왔습니다. 순경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간밤에 많이 놀라셨지요? 이 사람이 선생님 댁에서 강도질했다고 하기에 확인하러 왔습니다. 맞지요?”
이때 방 선생이 차분히 말했습니다.
“아, 이 사람 말이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었죠. 그런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사정이 딱해 보여서 내가 39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고맙다고 인사까지 하고 갔는데요.”
순경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 사람이 분명히 선생님 댁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을 했는데요?” 하며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래도 방 선생은 태연히 말했습니다.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내가 돈을 주니까 인사까지 하지 않았소?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법이 어디 있소?”
순경은 할 수 없이 강도를 풀어 주었습니다. 순경이 돌아가자 강도는 방 선생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세상에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방 선생은 강도의 등을 두드리면서 “일어나시오. 사람이 어렵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마시오”하고 타일렀습니다.
그러자 강도가 방 선생에게 간청했습니다.
“선생님, 저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선생님 곁에서 평생 선생님을 섬기며 살게 해 주십시오.”
그 후 강도는 죽을 때까지 방정환 선생 곁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강도가 강도질할 때 감사하라고 한다면 감사가 나올까요? 강도는 본성 자체가 감사가 나오지 않는 존재입니다. 부족함이 감사함보다 항상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강도에서 벗어나게 되면 작은 것에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강도로 만드는 세 욕구가 있습니다. 세속-육신-마귀입니다. 세속은 돈의 욕심이고 그래서 십일조도 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하느님 앞에서 주님 것까지 챙기는 강도가 됩니다.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욕구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하느님이 되기까지는 멈출 줄 모릅니다.
이를 위해 교회가 제시하는 방법은 자선(십일조)-단식-기도입니다. 자선하면 가난해집니다. 돈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모든 돈이 주님 것이라 고백하게 되니 받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를 지나치게 만족시키려 하는 사람도 도둑입니다. 절제하며 남는 것을 가난한 사람과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자기주장에서 벗어납니다. 자아가 뱀이고 늑대이고 모기입니다. 나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영원한 도둑놈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바보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슬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요즘은 아침마다 러닝머신에서 일정 시간 정해놓고 뜁니다. 뛰면서 감사한 일을 찾아 기도하려고 합니다. 처음엔 감사한 일이 많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몸이 힘들어지면 감사한 것보다 빨리 시간이 끝났으면 하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나를 물고 있는 늑대가 있습니다. 나의 피를 빨고 있는 모기가 있습니다. 나의 주인으로 사는 뱀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것이 나의 주인인 이상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도둑일 수밖에 없고, 감사하려고 해도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러닝머신은 처음에 고문하려고 만든 도구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에서 먼저 내려와야 합니다. 봉헌과 단식과 기도가 없이는 그것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 세 개를 통해 청빈-정결-순명의 덕이 생겨나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세상이 곧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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