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0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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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2020.8.25.)

by honephil 2020. 8. 25.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더 중요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3,23-26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노골적으로 ‘위선자’라고 부르십니다. 실제 삶에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면서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시라’는 1미터 정도 곧추 자라는 다년초로, 유다인들은 향기가 나는 그 씨를 양념으로 썼다고 합니다. ‘소회향’은 30센티미터 정도 자라는 한해살이 풀로, 그 씨를 역시 음식의 맛과 향을 돋우는 데 썼습니다. 박하는 매우 흔한 것이었고, 시라와 소회향은 들에서 그냥 자라기도 하지만 경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매우 하찮은 것까지 십일조를 내면서 더 중요한 실천 사항들은 간과하고 무시하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겉보기에 하느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서 실천하는 자선, 단식, 기도를 심지어 ‘숨은 일’로 하라 하셨던(마태 6,18 참조)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의 신앙 행위가 그저 자신들의 공적을 드러내고 남에게 보여 주려는 비뚤어진 행위였을 뿐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지금 각자가 일상에서 행하는 신앙생활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내 욕심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하며 살아가는 위선자인가를 식별해야만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중요한 기도를 제시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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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의 의미와 목적>

 

   아주 가끔은 어떤 분들이 자신은 십일조를 내는데 집이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십일조의 목적을 더 많이 받는 것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면 대부분 주님께서 충분히 보상해주십니다. 그러나 십일조의 진정한 목적은 재물을 더 많이 받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사랑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매님이 성지순례를 이혼하려는 목적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술주정뱅이에다가 도박, 폭력을 일삼는 남편과 살았습니다. 임신했을 때 남편이 자신의 아기가 아니라며 발로 차서 아기가 검게 죽어서 나왔습니다. 또 도박하려고 돈을 찾다가 돈이 없다는 아내를 유리창으로 밀어서 피바다가 된 적도 있었습니다. 더는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있는 돈을 다 털어 메주고리예로 성지순례를 떠났습니다. 이혼을 결심하러 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산을 맨발로 올라가던 중 갑자기 자신이 남편에게 더 잘못했다는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불평만 했지 진심으로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돌아가면 남편에게 잘못했다고 말하고 따듯한 밥 한 끼 차려줘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나와 있었습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며 술과 도박을 다 끊고 함께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겠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지순례의 목적은 사랑의 회복입니다.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십일조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목적을 잃으면 성지순례나 십일조의 의미도 퇴색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는 잘 바치지만, 더 중요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이 십일조의 목적과 정신은 잊고 그것을 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었기때문입니다.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의 목적을 잊고 율법 안에 갇혀버리는 것입니다. 기차만 타면 된다고 생각하고 목적지는 보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십일조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다고 십일조를 부정하지도 않으십니다. 분명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십일조의 의미와 목적을 명확히 알라는 취지의 말씀입니다. 십일조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얻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되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 번역에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실행해야만 했다”라고 나와 있는데, 사실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로 주님께 받는 대가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내면서 그 대가로 오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의로워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바로 가죽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가죽옷이 곧 의로움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곧 의로움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덕분으로 의로워지는 것이지 우리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자비’는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자비나 사랑이 들어있을까요? 자비와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자비는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우리가 탕감받는 일만 탈렌트인 것입니다.

  

   ‘신의’는 무엇일까요? 신의는 바로 ‘믿음’(pistis)입니다. 믿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는 당신 살과 피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십일조를 바치지만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바치는 이유가 바로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바치는 조건으로 먹을 수 있었던 나무가 ‘생명나무’입니다. 생명나무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버리며 십일조는 내서 무엇하냐는 것입니다.

  

   개신교는 십일조는 내면서 생명 나무는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법은 있는데 목적을 잊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멜키체덱에게 십일조를 봉헌하였습니다. 멜키체덱은 주님께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며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미사가 된 것입니다.

  

   가톨릭은 목적은 있는데 과정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내지 못하며 생명나무는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선악과를 봉헌한 대가입니다.

  

   개신교는 더욱더 생명 나무의 의미를 깨달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고, 가톨릭은 선악과의 의미를 깨달으려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 나무의 의미를 모르고 십일조를 내는 개신교는 어쩌면 당첨된 복권을 돈으로 바꿀 줄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십일조는 내고 성체 성혈은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톨릭은 당첨될 수밖에 없는 복권을 사지 않고 어차피 당첨될 것이니 돈을 달라고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생명나무가 효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교무금과 봉헌, 자선 등을 하고 있기에 당연히 가톨릭이 더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십일조와 빵과 포도주, 그리고 성체 성혈로 이어지는 의미가 다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https://youtu.be/-8po8AgxMfE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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