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연중 제20주일 (2020.8.16.)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21-28
그때에 예수님께서 21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물러가셨다.
22 그런데 그 고장에서 어떤 가나안 부인이 나와,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23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말하였다.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
24 그제야 예수님께서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25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님께 와 엎드려 절하며,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8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 활동 무대인 갈릴래아를 떠나시어 티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민족의 땅으로 가신 이유는 오늘 복음의 앞선 내용들을 짚어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으로 그 나라의 풍요로움을(마태 13,1-53; 14,13-21 참조)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과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기적을 통하여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마태 14,22-36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셨습니다(마태 15,1-20 참조).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예수님의 발걸음을 갈릴래아에서 이민족의 땅으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말을 해도 소용없고 기적을 통해서도 깨닫지 못하는 위선자들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민족 가나안 여인이 도움을 청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여기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외쳤던 ‘다윗의 자손’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일컫는 호칭이었습니다. 나탄 예언자가 하느님의 집을 지으려던 다윗 임금에게, 희망의 구원자가 바로 그 가문에서 나올 것이라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진작에 이스라엘에게서 나왔어야 할 신앙 고백이 이민족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예수님의 칭찬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입술로만 공경하는 위선이 아닌, 강아지에 비유하며 무시하시려는 예수님께 ‘강아지처럼 주인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먹겠다.’ 하는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그분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구원에 대한 희망과 참된 믿음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강아지가 주워 먹을 부스러기만큼의 믿음이라도,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신 희망의 틈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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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성경에서 사람을 세 부류로 나누는 것 같습니다.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사람, 직립 보행을 하는 사람, 하늘로 오르는 사람입니다. 이 구분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이 없는 가리옷 유다는 뱀과 같이 되었고, 아직 승천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들은 믿음이 있었다가 없었다가를 반복하며,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사람은 성모님처럼 하늘에서 삽니다.
오늘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 안에 이 세 부류의 사람의 모습이 다 들어있습니다. 마귀 들린 딸과 함께 살 때가 땅에 붙어 기어 다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생겨 그리스도께 치유를 청하기 위해 나섰을 때는 믿음이 조금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견뎌 기적을 얻어내었을 때는 하늘의 사람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비단 기적을 청하는 것에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영혼을 구원하는 어부가 되어보겠다고 나선 것이 소명을 발견한 것입니다. 물론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뭣 때문에 고생하느냐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주님 앞에 물고기만 들고나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앞에 나올 때 빈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소명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을 찾아 소명을 완수하고 그 열매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분명 그 소명을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버리고 주님 앞에 다다랐을 때 그 십자가가 없으면 건널 수 없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편한가요?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편할까요? 어차피 우리 모두 이러나저러나 고생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소명을 찾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고생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믿음으로 사람을 나눈다면, 사람은 일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시작만 하는 사람, 시작했다면 끝까지 가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그러나 내가 시작한 일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좌절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좌절을 선물하십니다. 일단 소리 지르며 따라오는 데도 들은 체도 안 하십니다. 그다음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라며 사람을 차별하십니다. 그다음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시며 거의 멸시까지 하시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하며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 좋게만 끝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희 속담에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말이 있습니다. 밥을 지으려다 실패하면 죽이 됩니다. 그러나 죽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일까요? 누구는 죽을 일부러 끓이기도 합니다. 죽만 파는 죽집도 있습니다. 죽도 잘 끓이면 멋진 음식이 되는 것입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란 말 안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미국의 어느 원예연구소에서 ‘희귀한 흰색 금잔화의 씨를 보내시는 분께는 큰 사례 하겠습니다.’라는 광고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액수가 너무 커서 순식간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잔화는 주황색이나 갈색뿐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흰색 금잔화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누구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이야기는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한 봉투에 흰색 금잔화 씨가 보내졌습니다. 70대 할머니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50대에 이 광고를 보고 흰색 금잔화 만들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금잔화 씨를 뿌려 주황색과 갈색의 금잔화 중에 색이 가장 옅은 것들의 씨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뿌려 또 색이 옅은 것들의 씨만 모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20년 거치다 보니 흰색 금잔화가 탄생하게 됩니다. 전문 지식을 갖춘 어떤 누구도 해내지 못한 보통 시골 할머니가 금잔화의 새로운 종을 만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웨이슈잉’의 『한 번이라도 끝까지 버텨본 적 있는가』라는 책에 소개된 일화입니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승부는 폭발력이 아니라 버티는 힘에서 갈린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진짜 믿음은 끝까지 버티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이 말합니다.
“성공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도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포기하기 때문이다.”
저는 요리를 못합니다. 하다못해 김치찌개도 끓이지 못합니다. 김치찌개를 생각하면 실패한 김치찌개의 모습부터 떠올리게 되니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김치찌개도 못 끓이지만 시도하고 끝까지 가면 김치찜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청년은 난독증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억력도 좋지 않습니다. 햄버거 가게에 알바로 취직하려고 해도 햄버거 종류를 다 외울 수 없어서 취직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카페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메뉴를 외우는 것도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몇 번을 그만두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끝까지 버텨서 지금은 원두 이름과 팥빙수 만드는 것만 배우면 커피숍을 단독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모든 기술 배우기가 끝난다고 합니다.
수 없는 실패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이란 정신으로 가야 합니다. 물론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했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미리 실패할 것을 생각하고, 미리 좌절할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일이든 끝까지 가면 실패는 없습니다. 밥 아니면, 어쩌면 밥보다 더 맛있는 죽이 됩니다. 끝까지 가면 밥 아니면 죽이지만, 시작하지 않거나 중도에 포기하면 먹을 수 없는 쓸모없는 것이 됩니다. 믿음이 겸손과 비례하는 이유는 겸손한 사람에게 그 믿음을 꺾을 두려움을 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을 멈추었을 때는 생각하고, 생각했다면 실행하십시오. 그리고 실행했다면 반드시 끝까지 가 보십시오. 그러면 다음 것을 시작할 때 큰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적어도 죽을 끓일 수 있는 기술은 남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일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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