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 그는 1917년 성모 신심 단체인 ‘성모의 기사회’를 설립하였다. 이듬해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은 콜베 신부는 평생을 선교사로 살아가다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때 체포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다.
여기서 한 수감자가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수용소에서는 한 명이 탈출하면 열 명을 지목하여 처형하는 벌이 있었다. 이에 따라 지목된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에게는 가족이 있다며 울부짖자 콜베 신부는 그를 대신하겠다며 앞으로 나갔다. 결국 콜베 신부는 다른 아홉 명과 함께 굶겨 죽이는 아사 형벌을 받고 처절한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41년 지하 감방에서 선종하였다. 이러한 그를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자비의 순교자’라 부르며 시성하였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3-12
그때에 3 바리사이들이 다가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고 물었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읽어 보지 않았느냐?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5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하고 이르셨다.
6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7 그들이 다시 예수님께, “그렇다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려라.’ 하고 명령하였습니까?” 하자,
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너희가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는 자는 간음하는 것이다.”
10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허락된 이들만 받아들일 수 있다.
12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오늘의 묵상 ||||||||||||||||||||||||||||
조선 시대에는 남성만이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 행실이 음탕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도둑질하는 것, 곧 칠거지악으로 불리는 일곱 가지 항목은 부인을 쫓아낼 수 있는 명분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나 ‘삼불거’라고 하는 ‘여성 보호’ 조항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칠거지악을 저지른 아내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 경우로, 돌아가서 의지할 데가 없거나, 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치렀거나, 가난할 때 같이 고생하다가 뒤에 부귀하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그러나 삼불거는 실제로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탈출기에 나오는 십계명에는 이혼을 허락하는 계명이 없습니다. 오히려 간음과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시비 거는 이혼장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24,1-4 참조)에 나옵니다. 사실 신명기의 이 규정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남편이 함부로 이혼할 수 있는 명분이나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이유로 부인을 함부로 내쫓는 것을 막으려는 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산상 설교에서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마태 5―7장 참조).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느님의 처음 의도대로 남녀의 결합이 가지는 존엄성을 회복시키고자 말씀하신 것이 오늘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수백 겁의 인연이 쌓여야 비로소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는데, 예수님의 혼인 선언이야말로 부부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큰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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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까지 해내는 사람의 비밀!>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결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유가 합당하다면 아내를 버려도 좋은 것 아니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는 하느님이 맺어주셔서 한 몸이기 때문에 감히 인간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리사이들은 그러면 어째서 모세는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율법을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때는 이스라엘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그것에 맞는 음식을 준 것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도 왜 결국엔 끝까지 가야 할까요? 왜냐하면, 결혼은 끝까지 가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결혼생활이 끝날 때 변한 나의 모습이 목적입니다. 내가 누군가와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한 것입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며 많은 사람이 감동하였습니다. 분명 그 두 분 어르신들이 살아오면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많은 실수도 서로 주고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갔기에 많은 분으로부터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삼국을 통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유비도 죽고, 조조도 죽고 손권도 죽었습니다. 세 나라의 건국 영웅들이 다 죽었지만, 중국은 통일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비의 ‘제갈량’과 조조의 ‘사마천’만이 마지막 두 영웅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은 항상 제갈량에게 패했습니다. 당대 제갈량을 이길 영웅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국을 통일한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제갈량과 겨루어 승리다운 승리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마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워런 버핏도 성공의 비결을 물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우스갯소리처럼 들리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한 가지 길로 끝까지 가면 반드시 어떠한 형태든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중도에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여기서 끝까지 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이 하나 나옵니다. 바로 끝까지 견디면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중도에 실패하는 것을 겁내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일등이 목표가 아니라 끝까지 뛰어 결승점을 통과하면 그것이 이기는 것임을 압니다.
사마의와 제갈량의 전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시간만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의 마음을 흔들어놓기 위해 선물을 보냅니다. 그 비단으로 싼 상자 안에는 여인의 장신구와 옷이 들어있었습니다. 여자처럼 그러고 있지 말고 당당하게 한 판 붙자는 말이었습니다. 사마의는 평정심을 잃지 않고 그 상자를 들고 온 군사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군사는 제갈량을 자랑하였습니다. 음식도 반밖에 안 드시고 잠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며 업무에 집중하고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생각했습니다.
‘얼마 못 가겠군!’
결국, 천하의 제갈량은 54세에 과로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 통일의 주인공은 사마의가 되었습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승리하는 것보다 끝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는 것만이 좋다는 것을 안다면 게으를 수 있습니다. 열매는 맺히겠지만 볼품없을 수 있습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가정생활을 엉망으로 하면서 끝까지 가기만을 고집한다면 그 결혼생활에서는 끝까지 견뎌낸 상대만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빠져서 안 되는 것은 ‘소명’입니다. 이것 역시 믿음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결혼의 주체가 자신이라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결혼의 주체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신 것이니, 당연히 끝까지 가야 하면서도 ‘잘’ 가야 합니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켰는데 갔다 오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다른 곳을 헤매다가 다음 날 들어온다면 비록 일은 했으나 칭찬을 듣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일을 하거나, 누구와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나에게 맡겨진 ‘소명’인지 살펴야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반드시 하느님 앞에서 그 상대가 주님께서 선택하신 상대인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확신이 있으면 결혼하고, 일단 결혼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사마의가 관직에 올라도 될 나이가 차자 조조가 그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그 벼슬을 거부했습니다. 이는 북한에서 김정은이 내리는 관직을 거부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마의는 조조의 성격을 알기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중풍 병자 흉내를 냈습니다. 이를 믿지 않은 조조는 사마의를 염탐하게 시켰고 사마의는 몇 년 동안이나 중풍 병자 흉내를 내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도 이 정도면 하늘의 뜻이라 여겨 결국 받아들입니다. 사마의는 이후 몇 대의 조조 후손을 임금으로 모시며 통일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끝까지 가려면 하늘의 뜻인지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뜻임을 확신한다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결과도 좋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도 없습니다. 시련을 잘 견뎌냅니다. ‘끝까지 가는 게 이기는 것이다.’,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주님이시다.’ 이 두 믿음만 있다면 끝까지 가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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