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22-33
군중이 배불리 먹은 다음,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24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
마침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었다.
25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26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 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32 그러고 나서 그들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
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삶의 불안 속에서 스스로 거두지 못하는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시는 주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1독서의 엘리야 이야기는 복음의 베드로 이야기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과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만 당신을 만날 수 있는 호렙산으로의 여행에 엘리야를 초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는 베드로를 당신께 걸어오도록 초대하시는 예수님과 비슷합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돌풍, 지진, 불길 속에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잔잔한 미풍 속 작은 속삭임을 통하여 당신의 존재를 엘리야에게 드러내십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잠잠해지지 않았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하는 것은 바로 베드로의 말과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믿음은 한순간 순수하여 오직 주님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오너라.”라는 말씀으로 초대하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순수한 믿음은 불안과 의심으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는 다부진 용기가 아닙니다. 그보다도 우리 자신의 눈길이 결코 흐트러짐 없이 오직 주님만을 향하며 믿음의 길을 갈 때, 주님의 힘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의심하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자기 자신 안에서 둘로 떨어져 나간 상태’, ‘마음이 둘로 갈라져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자신감이 허물어진 상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마음이 둘로 갈려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흐트러짐 없이 바라보는 온전한 믿음만이, 불안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삼키려 입을 벌리는 바닥 모를 심연을 뛰어넘게 할 것입니다.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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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라 가르치면 자녀 인생 망친다>
“제가 평생 열심히 노력해서 살아왔는데, 결과는 비참합니다.” 이런 한탄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노력은 좋은 것일까요? 분명 대부분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력해서 되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 노력했더니 원하는 관계가 맺어졌나요? 노력했더니 인생에서 성공했나요? 오히려 노력하는데도 안 되는 것이 많지 않았습니까? 자녀에게 노력하는데 자녀는 그 마음을 알아줍니까? 배우자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나요? 직장에서 노력하는데도 오히려 인정은 다른 사람이 받지 않습니까?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은 세상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종의 덫이고 함정입니다. 노력해서는 절대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덫에서 빠져나오려면 왜 지금 우리가 하는 노력이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공부하고 왜 일하고 왜 자녀를 키우나요? 사실 우리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을 갖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날까 봐 두려워 노력하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할까 노력하며, 자녀들에게 자신들을 왜 그렇게 키웠느냐는 원망을 받을까 봐 노력합니다.
이렇게 두렵지 않으려는 근저에는 ‘행복’이란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아야 행복할 것이라 믿습니다. 두려움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고 믿는 것을 노력해서 갖게 되었다면 두렵지 않나요? 이젠 그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데, 이젠 그 사람이 바람피울까 봐 두려워합니다. 일단 인간은 노력만으로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욕구에서 나오는데, 그 욕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욕구라는 컵에 담긴 물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 물을 마시기 위해 욕구까지 들어 올리게 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는 마음도 동시에 생겼습니다. 사실 욕구가 사라지면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두려움을 없애려면 욕구부터 없애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욕구의 최종목적지는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욕구는 생존을 넘어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습니다.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여겨주지 않으니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배우자와 결혼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인정받으려 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은 인생의 성공이 무엇이냐 물을 때, “나를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번 사람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리상담사, ‘고코로야 진노스케’의 『너무 노력하지 말아요』란 책이 있습니다. 고코로야가 심리상담사로 처음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우선 강연을 통해 사람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지금 참가 신청을 하면 최신 사은품을 준다고 하고, “이 강연에 참여하면 내일부터 당신을 다른 사람!” 이런 문구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열심히 홍보해도 강연장은 텅텅 빌 때가 많았습니다.
고코로야는 계속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내어 바꿔보려 했습니다.
‘홍보를 잘 못 했나?’, ‘수강료를 좀 더 싸게 했으면 잘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바뀌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아! 내가 내 강의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구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강연이 ‘더 싸고 좋은 혜택이 있어야지만 관심을 가질만하다.’라는 전제로 강연의 가치가 낮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파는 사람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것을 사는 사람이 어떻게 가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후 그는 ‘내 강연은 수강료가 비싸도, 사은품이 없어도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강연이다.’라고 전제를 바꾸고, 원래는 도쿄까지 올라가서 하던 강연을 사은품도 없애고 자신의 고향인 교토에서 그냥 열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강연장에 사람이 꽉 찼다고 합니다. 노력은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믿으면 그 노력은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근원적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나옵니다. 한 부류는 두려움의 바다와 맞서 끊임없이 노를 젓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인정받으려고 평생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들에게 두려움은 오직 노력으로만 극복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한 사람을 보는 것은 유령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을 이미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극도로 두려워합니다. 현실이 아니라 유령처럼 바라봅니다. 저런 방식으로는 절대 자신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자기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베드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의 바다를 예수님처럼 걸어보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라면, 이미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으로 그 바다를 넘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리고 물 위를 걷습니다. 물론 그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여 다시금 두려움에 빠지기도 하지만 베드로가 느끼는 두려움은 이미 배 위에서만 머무는 제자들이 느끼는 두려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두려움입니다. 배 위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은 끝나지 않는 두려움으로 살겠지만, 베드로는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물 위를 자유롭게 걷게 됩니다.
고아로 남의 집 식모살이만 하시며 자라신 저희 어머니가 자살을 생각하실 때 물 위를 걸어오시던 예수님은 나병 환자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꾸시며 “저런 사람도 사는데 너는 왜 못 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힘든 것은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인정받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해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노력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십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께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임을 믿어야만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든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졌을 때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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