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무렵 이탈리아의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학업을 마친 그는 수도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동굴에서 3년 동안 고행과 기도의 은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성덕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베네딕토는 마침내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서방에서 처음으로 수도회 규칙서에 공동생활의 규정을 제정하였다. 이 규칙서는 수도 생활의 표준 규범서로 삼을 정도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베네딕토 아빠스는 547년 무렵 몬테카시노에서 선종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그를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육신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24-3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25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
26 그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
28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32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많은 경우에 경외로 표현합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은 “영광과 자랑”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물”이며 “지혜의 뿌리”로 표현됩니다(집회 1장 참조). 반면에 다른 두려움은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근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이 심해지면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에서 오는 두려움은 우리 자신을 속박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움이라는 같은 말이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릅니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다른 두려움입니다. 하나는 우리를 위축시키고 겁먹게 하는 두려움이지만, 다른 하나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 약함은 하느님을 찾고 그분께 의탁하게 합니다. 약한 것이 문제라기보다 그것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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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없는 사람은 나침반 없는 선장과 같다>
우리가 아무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영향을 받는 이들은 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제자들은 우리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인리히 힘러’란 독일 사람은 딸에게 이러한 편지를 썼습니다.
“언제나 품위 있고 용감하며 관대하게 살아야 한다.”
하인리히 힘러는 1941년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지휘하고 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를 담당하는 주동자였습니다. 그가 1943년 나치 친위대에게 한 연설에서는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을 절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음은 그 연설의 내용 일부입니다.
“나치의 친위대들이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직하고 품위 있고 충실하며 동지애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우리와 같은 피를 가진 동지들에게만 해당합니다. 러시아인이나 체코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나는 아무 상관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다른 민족의 아이들을 납치해 우리를 위한 노예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나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독일인들은 이 세상에서 인간 동물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압니다. 우리 고유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에게 결코 희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짐승들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다른 민족들을 짐승 취급하는 아버지를 스승으로 둔 딸은 잘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버지와 같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들을 동물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스승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좋은 스승이 될 수 있을까요? 자신이 배운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우리는 또한 누군가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훌륭할 제자일수록 또한 누군가의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어떤 스승이 되느냐는 내가 누구를 스승으로 삼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본당 젊은 부부가 잠깐 찾아와 함께 식사한 적이 있습니다. 5살,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아들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큰아이는 남자답게 생겼고 둘째는 약간 여성스럽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보는 순간부터 큰아이가 더 착해 보였습니다. 부모님들도 첫째가 더 착하다고 했습니다. 식사할 때도 둘째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습니다. 아빠가 안고 있었는데 아빠가 밥을 먹을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부족하게 받은 것입니다. 밥 먹다, 돌아다니다, 울다, 웃기를 반복했습니다. 반면 큰아이는 장난감 하나 가지고 얌전하게 놀았습니다.
부모가 말해주었습니다. 첫째 아이를 가졌을 때 부모는 신앙심으로 똘똘 뭉쳐서 약혼자 주말 봉사까지 하였습니다. 아이가 생기기 전부터 54일 기도를 바쳤고 그 기도가 끝나는 날 아이가 들어섰으며 그 이후에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함께 기도를 바쳤습니다.
반면 둘째를 가질 때는 살림이 어려워져 아내까지도 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아기를 위해 기도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기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사랑을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육체적으로 먹이기 위해 영적인 돌봄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바로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을 때 그렇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하나만 알고 그것만을 위해 힘을 쓸 때 진정으로 아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잊지 않게 하는 분이 지금 나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나의 스승이 누구냐에 따라 나에게 배우는 이들도 영향을 받습니다.
오늘은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이탈리아 중부 지방 누르시아에서 태어난 성인은 480년 최고의 스승이 몰려있는 로마에서 공부하기 위해 올라옵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학문을 가르치는 스승들에 환멸을 느껴 수비아코라는 산속으로 들어가 동굴 속에서 3년 동안 성경만 읽습니다.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규칙으로 수도원을 세웁니다. 이 수도원은 서방 수도회의 시초가 된 것을 넘어서 유럽 전체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1500년이 넘게 그분의 가르침을 따른 제자들은 숫자를 가늠할 수 없게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승이 있다는 것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어차피 누군가의 선장이 되어야 한다면 나의 나침반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유대인들 속담에 “길 가다가 넘어져 책과 옷이 더럽혀지면 옷보다 책부터 먼저 닦아라.”란 말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보다 나의 스승이 누구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에게 주어진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의 스승을 명확히 세워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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