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02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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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2020.6.26.)

by honephil 2020. 6. 26.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4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2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인상적입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과연 예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왜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까요? 왜 우리 삶은 아쉽고 부족한 것이 많을까요?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다 채워 주실 텐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느냐, 그렇지 않으시냐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지느냐, 그렇지 않으냐입니다.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우리가 만족한다면, 그분께서는 그냥 기도를 들어주는 기계나 부적에 지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이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신과 가까워지고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단순히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분께서는 만족하지 못하십니다.


부모와 자녀들만 보아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생일 선물을 주고, 용돈을 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녀 가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모른 채 선물이나 용돈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 자녀는 아직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철없는 자식일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소원을 정화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그렇습니다. 소원을 빌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바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원을 들어주시는 바로 그분과의 관계에 더 충실합시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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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간 금요일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그때에 어떤 나병 환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그러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마태 8,1-4)

전인적인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구현하는 것, 가톨릭 병원 CMC의 이념을 담은 모토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병원을 운영하는 목적은 그냥 육체적인 질병을 낫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최첨단의 좋은 의료시설과 정예화된 의료진의 의료기법만 가지고 환자에게 기능적으로 가는 것만으로는 뭔가 2% 부족한 것이라는 거죠. 왜? 예수께서는 불치병, 난치병을 고치심으로써 단지 몸의 온전함이라는 선물만을 주시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병은 사람의 행복을 파괴하는 사태입니다. 그런데 병고로부터의 회복을 통해서 건강해지고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아픔의 제거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나병환자에게서 부스럼과 종기가 사라지고, 절단되었던  신체 부위에 새살이 돋아난다는 것은 몸의 회복을 포함해서 그동안 비정상적이었던 모든 관계가 제자리를 잡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몸만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온전해져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사제들에게 가서 정해진 예물을 바쳐 확인받는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섞여서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얼크러졌던 관계가 이제 다 풀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의 결과로 인해 이런 지긋지긋한 병이 생기는 줄 알던 이들에게 이 사람의 죄의 대가가 다 치러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치유는 온전한 삶으로 그 환자를 돌려주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 지긋지긋한 고통을 겪고 난 다음의 나병 환자의 삶은 이제 예전과 똑같을 수는 없어집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를 변화시킵니다. 그 만남이 이제 그를 결정적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 코린 5,17)

가끔 병문안을 위해 병원에 갑니다. 가벼운 병이야 위로할 말이라도 있지만 중한 경우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위로하는 이나 위로받는 이나 이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짐작합니다. 그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손을 얹어 기도하지만,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하지만, 묵주가 돌고 돌아 끊어지도록 기도하지만, 이번만 살려주십사고 기도하지만 허망하게 끝나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기도가 부족했던 것일까, 하느님께서 냉정하신 것일까, 주님의 권능은 왜 이리 제한적인가, 우리가 뭐 그리 잘못한 결과란 말인가? 질문은 끝이 없지만 답도 없는 질문, 허공에 대고 허우적이는 질문일 뿐입니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엄습해오며 우리는 그렇게 허무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것은 다 낡아버려 사라지고 마는 것이라는 엄정한 진실 앞에 놓이게 됩니다.

‘주님, 하고자만 하시면’, 단지 그렇게 청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일어날 것이고 주님이 아니라시면 아닐 밖에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어렵습니다. 왜 ‘하고자 하시지 않으시는지’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더 철저하게 낮아짐을 배우라시면서 우리가 처한 끔찍한 상황 속에서 다가가고 부르짖으며 청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이죠. 나의 기도가 다 들어졌기에 좋으신 하느님이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거절되고 외면받는 듯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여전히 참 좋으신 하느님이심을 아는 것, 이 어려운 일을 해내고 이 힘겨운 기도를 바치라고 나병환자의 입을 통해 당신 앞에 서는 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하고자 하시면, 제발 그렇게!’ 


오늘도 병상에서 온갖 질병과 싸우는 이들에게 당신 치유가 얼마나 온전한지를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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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복음에서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도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원하시면 다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일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운전자가 내비게이션과 운전을 일치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청하면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분이 원하시는지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실법한 것을 내가 원해도 잘 들어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방향을 분명히 잡고 있었지만, 액셀을 충분히 밟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 환자는 엑셀을 끝까지 밟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그것 하나로 집중해야 합니다.

 

      1895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는 비통한 슬픔에 잠겼습니다. 목화 재배로 유명한 이곳에 갑자기 목화 바구미가 들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목화 수확은 절반으로 줄었고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나돌았습니다. 도시는 삽시간에 실직자와 결식자의 탄식 소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밭에서 목화를 뽑아내고 그곳에 땅콩을 심었습니다. 20년 후, 이곳은 ‘땅콩의 수도’로 불릴 만큼 풍요로운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엔터프라이즈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화 바구미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는 목화 바구미에 감사한다. 그날의 시련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목회 벌레여, 그대들이 준 고난에 감사하노라.”

 

      우리는 목화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풍족한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들어주실 가능성이 크지만, 본인도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이끌어주셔도 따라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25가지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중에서 더 중요한 5가지만 정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쓰십시오. 그 5가지에 힘을 쏟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20가지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런 버핏이 투자의 귀재가 되었다면 주식만을 생각하며 그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김연아 선수에게 어떻게 그런 경지까지 올랐느냐, 선천적인 것 아니냐고 질문하면 반드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전 그 목표만을 위해 달렸습니다.”

 

      어떤 미국인이 허리케인이 자신의 집을 다 날려버렸을 때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중요한 가족과 함께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나머지는 다 날아가도 됩니다. 그러나 집에 두고 온 물건을 되찾으려다가는 가족까지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고 그것만을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환갑이 넘은 늦은 나이에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여 여든이 되어서는 전국 각지에서 그 정원을 보기 위해 찾아오게 만드는 훌륭한 정원을 꾸몄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나에 집중하면 평생 뿌듯해할 무언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원하지 말고 정말 나도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것 한 가지를 찾읍시다. 그리고 마치 경주하는 말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앞만 보도록 눈가리개를 한 것처럼, 그 방향으로만 나아갑시다. 스티브 잡스는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원하되 절실하게 원하라고 했습니다. 진정 내가 원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3개월만 지나면 나의 희미한 믿음을 확신시켜 주는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https://youtu.be/p7P6hZO4JeY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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