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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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2020.6.24.)

by honephil 2020. 6. 24.

세례자 요한은 사제였던 즈카르야와 성모님의 친척인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세례자 요한은 주님에 앞서서 그분의 길을 닦은, 구약과 신약을 이어 주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임금의 비윤리적 생활을 책망하다가 헤로데 아내의 간계로 순교하였다. 그는 ‘말씀’이신 주님의 길을 준비한 ‘광야의 소리’였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80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80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가 아니라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부른다면 당시 관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반면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아버지처럼 사제가 되어 명망을 얻고 존경받으며 안정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요한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언자가 되어 명망과 존경보다는 박해를 받고, 기득권의 삶보다는 광야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이 두 가지 갈림길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선장이 갑판 위에서 보니 어떤 불빛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은 확성기에 대고 외쳤습니다. “여보시오. 남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그러자 저쪽에서 즉각 반응이 왔습니다. “그 배가 북쪽으로 10도를 회전하시오.” 선장이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외쳤습니다. “이 배는 거대한 함정이란 말이요. 그쪽이 움직이시오.” 그러자 상대편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쪽이 움직여야만 하오. 이곳은 섬이고 나는 등대지기요!”


섬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배가 움직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뜻대로 하느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맞게 우리가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움직인 즈카르야는 혀가 풀려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때 우리 삶 또한 찬양이 될 것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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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주신 말씀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루카 1,57-66.80)

탄생 8일째 되는 날, 전통적인 할례를 통해 요한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몸에 새깁니다.
한 인간 안에 야훼의 계약이 새겨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구원의 약속이 그저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장엄한 종교적 행위입니다. 불가에서는 출가자들이 깨달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외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연비 공양을 합니다. 팔뚝에 향을 살라서 몸에 새기는 것이지요.
신부 수녀님들이 잿빛, 검정색 옷을 입고 머리를 가리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나, 스님들이 수좌의 옷을 입고 삭발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로 이러한 종교적 의미,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귀의와 의탁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할례는 유대교에서 이제 하느님께 이 아이가 봉헌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의례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유아세례 같은 것이겠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대에는 생후 8일 이전에 세례를 받도록 규정했습니다. 혹시라도 아기가 세례 받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일을 당할까 봐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이죠.


멀쩡하게 혼배도 했거든요. 봄에 혼인했는데 여름 지나서 뚝딱 아이가 태어났데요. 참 요새는 뭐든지 다 빨라요. 하여간 그래서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고 그 다음해 봄이 되었는데 연락이 없어요. 아이를 안고 미사 나왔어요. 얘기하는 거죠. ‘아이고, 엄마 닮아서 코가 납작하구나.’ 이러면 안돼요. 솔직하게 제 눈에 그렇게 보여도.. 세상에 둘도 없는 아이인 것처럼 어쩌면 이렇게 천사 같냐고, 낯도 안 가리고 애가 순하다고 거듭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우리 꼬마, 세례명이 뭐예요. 없대요. 왜 없냐니까 아직 세례 안 주었답니다. 돌이 다 돼가는데 왜 미루었냐고 담달에 신청하라니까 안 한답니다. 왜 안 하냐니까. 애가 커서 사리 분별하게 될 때쯤 스스로 판단하게 하겠답니다. 헌법에 종교는 자유래요. 그러면서 자기는 너무 어릴 적에 유아세례 받아서 할 수 없이 원치 않았는데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런 이런! 

헛똑똑 엄마 아빠들이 너무 많아요. 원하면 주는 것이 합리적인 부모의 자세라는 거에요. 아이에게 결정권을 줘야지 부모가 종교를 결정해주는 것은 아이를 무시하는 거라는 겁니다. 아이 아프면 병원 안 갑니까? 갑니다. 주사도 맞추고 약도 먹인데요. 아이 좀 더 크면 공부 안 시키겠네요? 무슨 소리, 이미 태교부터 치밀하게 했데요. 애가 주사 맞는 거 좋아합니까? 안 좋아해요. ‘나 주사 좋아. 따끔거리는 거 너무 재밌어.’ 이러는 아이 없거든요. 흰 가운 입은 사람만 보면 본능적으로 울어대요. 그래도 주사 맞힙니다. ‘난 공부가 제일 좋아. 하나하나 문제 풀어가고 공부할 때 인생의 심오한 진리를 알아가는 쾌감이 있어.’ 이러는 아이는 없거든요. 그런 아이는 뭔가 특이한 아이죠. 이상한 아이예요. 그런데 아이가 원치 않아도 억지로 학원도 보내고 학습지도 풀게 하고, 감시하면서 아이를 가르치고 기르면서 말이죠. 이 엉뚱한 엄마 아빠들이 신앙만은 아니라고 말한다는 거죠. 솔직하게 말하면 자기 믿음에 자신이 없는 겁니다. 그것을 에둘러서 애한테, 애가 결정하도록 할래요-하고 말한다는 거죠.


그걸 보고 헛똑똑이다 그럽니다. 다른 것은 애가 싫어하더라도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면 억지로라도 줘야 한다고 하면서, 신앙만은 거기서 제외하는 이런 현상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학원과 경쟁해야 하고, 교회가 인터넷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신앙은 일차적으로 대물림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엄마 아빠들이 자신들이 가진 가장 좋은 것, 그것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에게 전해줄려고 할 텐데,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한은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신앙을 전수받았습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율법과 기도를 배워 날이 갈수록 은총이 충만해지셨습니다. 우리 아이들,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믿음의 유산이 전해지고 풍성해져야 교회가 끊임없이 하느님 백성으로 가득 찰 수 있습니다. 전해주기 위해선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도 가지지 못한 것을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신앙을 대물림하기 위해 복음과 기도로 가득 차서 대를 이어 주님 오실 날까지 믿음의 백성들을 세우도록 기도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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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물론 사랑의 실천이겠지만 그 이전에 가져야 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랑은 위선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요한 세례자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겸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방향’입니다. 내가 겸손해져 작아질 때 내 등 뒤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이 빛보다 어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 친구와 함께 집 앞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폭 세 명이 들어와 옆에서 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 조폭이 술 마시는 것을 보았는데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일 큰 보스가 중간 보스와 이야기하며 막내에게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의 술잔이 어디 있는지 보지도 않고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막내는 보스가 술을 어디에 따르든 손을 뻗어서 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포장마차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고 술을 마시고는 다시 잔을 놓는 것이었습니다.

 

      저희가 먼저 일어나 집으로 나오는데 그 막내가 쫓아 나왔습니다. 저희가 비웃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 인상도 조폭 같았는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폭들은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에 이쪽 조폭들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저 담배 한 대 같이 피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배우지 않았지만, 저도 조폭인 척 담배를 받아 물었습니다. 기침이 나왔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참았습니다.

 

      그때 보스가 무슨 일이냐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키도 크고 몸집도 컸습니다. 위압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막내가 뭐라 변명을 하니 보스가 “찌그러져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이 그렇게 찌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스는 괜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고는 우리를 보내주었습니다.

 

      겉만 보면 조폭 두목의 부하는 매우 겸손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겸손하며 누군가를 더 크게 보이게 만듭니다. 문제는 조폭 두목을 크게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으로만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언가 얻어내기 위해 직장 상사에게 굽신거릴 수도 있고, 아니면 사람들에게 겸손하다는 말을 듣기 위해 억지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이 뛰어났던 이유는 그가 작아짐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작아짐입니다. 내가 굽히고 작아짐으로써 내 등 뒤에 있는 누군가를 사람들이 보게 만드는 것이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사탄이 보일 수 있고, 어떤 사람의 겸손 뒤로는 그리스도가 보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겸손은 꼭 필요하지만 내가 겸손함으로써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 뒤로 그리스도께서 보이게 하신 이유는 그가 ‘광야’라는 곳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두 방향을 향할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 혹은 광야나 도시입니다. 광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을 의미합니다. 그것에게서 벗어나는 장소가 광야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가난하게 살며 재물의 욕심에서 벗어나고 있었습니다. 낙타 털옷은 옷을 지어 입기 위해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다는 뜻은 육신을 절제했다는 뜻이며 마귀를 멀리했다는 뜻은 자신을 낮추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모든 영광이 그리스도께 흘러가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육체의 욕구, 혹은 명예욕이 있는 상태로 겸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들은 도시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보름에 한 번씩 며느리의 가계부를 검사했습니다. 콩나물과 두부, 연필과 공책값도 철저히 점검했습니다. 결혼 예복을 50년 동안 입었습니다. 손자들의 속옷을 기워주는 것이 그녀의 취미였습니다. 그녀의 유언은 “나를 위해 꽃을 장식하지 말라. 그리고 1달러를 황금처럼 아껴라.”였습니다. 세수한 물로 머리 감고, 머리 감은 물로 세탁하고, 세탁한 물로 걸레 빨고, 걸레 빤 물은 화단에 뿌렸습니다. ‘절제’와 ‘청빈’의 상징인 이 여성의 이름은 프란체스카이고, 한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의 영부인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평가가 어떻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 대통령을 더욱 크게 만들어주는 영부인의 멋진 삶을 사신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손길로 인도되던 사람이었고 그 결과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삼구와의 싸움을 통해 자신을 낮추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은 광야입니까, 아니면 도시입니까?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광야로 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광야는 내 안의 세속-육신-마귀와의 싸움의 장소입니다. 이 욕구와의 싸움이 없다면 겸손은 위선이 됩니다.

https://youtu.be/kF90JdXD5Gs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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