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0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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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020.6.15.)

by honephil 2020. 6. 15.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8-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어느 동네에 사이가 좋지 않은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중 한 사람이 마술 램프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가 램프를 문지르자 그 안에서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요정은 그를 주인이라 부르며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세 가지 소원만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주인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그것의 두 배를 누리게 됩니다.”


램프의 주인은 요정에게 궁전만 한 집 한 채가 생겼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정말 으리으리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웃집에서 갑자기 집이 두 채가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램프 주인은 요정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저놈과 더 이상 마주치고 싶지 않아. 외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게 나에게 100억만 보내다오.” 요정은 이 소원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웃집에는 200억이 생겼습니다. 배 아픈 주인은 마지막 소원을 빌었습니다. 그것은 불행히도 자기 한쪽 눈을 잃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원수 같은 이웃이 양쪽 눈을 잃게 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다소 유치한 예화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유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미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상대방의 불행을 꿈꾸다가 자신마저 불행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무리 불의를 저지르는 악인일지라도 그의 불행을 바라지 말고 그를 끝까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하라는 의미입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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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영성의 수준’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발끈할 때를 돌아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혹은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응하고 발끈한다면 딱 저의 수준이 거기까지입니다. 발끈한다는 말은 공격받는 것에 대해 나의 ‘자아’가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큰 개나 큰 물고기와 같은 동물들은 작은 물고기나 고양이가 괴롭혀도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싸우겠다고 으르렁거리면 비슷한 수준이란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자전거를 배우고 있다면 뒤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잡아주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에 두려워하고 길이 울퉁불퉁해서 소리를 지른다면 뒤에서 잡아주시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세상 것에 두려워 반응하거나 발끈하지 않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았지만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중의 한 분이 박보영 목사입니다. 그분은 의사를 하다가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길거리 아이들을 키우며 목회를 시작했던 분입니다. 그분을 제가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 사건 때문입니다.

 

      한 번은 자신이 키우는 여자아이가 길거리 생활을 다시 하기 위해 가출했습니다. 몇 주 뒤에 아이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통사정하고 다시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목사님을 부르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임신한 상태인데 그 아버지가 목사님이라고 아이가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때 등 뒤에서 선생님들의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뭐라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이는 죄책감을 견딜 수 없어 목사님의 아이가 아니라 가출했을 때 만난 오빠의 아이라고 실토하였습니다.

 

      어떻게 자신을 흉악한 범죄자 취급을 하며 욕을 하는데 반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아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영성은 자아를 얼마나 죽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저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끈하면 나의 영성은 거기까지입니다.

 

비오 신부님은 사제 서품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오상을 받으셨습니다. 신자들은 성인 신부님으로 좋아했지만 몇몇 고의 성직자들은 그것을 마귀의 장난으로 여겼고 그렇게 보고하여 교회는 신부님이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금지했습니다. 신부님은 아무 반응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여 혼자 몇 년 동안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지만 신부님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받을 때 그분의 자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 영성의 수준입니다. 내가 어떤 일에 자주 발끈한다면 나의 수준이 거기까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주 꾸던 꿈이 슈퍼맨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높이 날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계속 건물과 산에 부딪혀서 떨어졌습니다. 우리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로 오르는 방법은 그리스도처럼 못 박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실 때 참지 못하시고 발끈하셨다면 이 지구 상에 어떤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재로 만들어버리실 수도 있으십니다. 만약 그러하시다면 그분은 하느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되시기 위해 그분은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인간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못들에 의지하여 하늘로 높이 들리우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처럼 지상의 어떠한 것에도 반응하는 수준이 되지 말라고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https://youtu.be/LyEoChfQD-M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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