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주님 수난 성금요일 (20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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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주님 수난 성금요일 (2020.4.10.)

by honephil 2020. 4. 10.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본디 이날의 전례는 말씀 전례가 중심을 이루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십자가 경배와 영성체 예식이 들어와 오늘날과 같은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 오늘은 금육과 단식을 함께 지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 요한이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입니다. 18,1―19,42
○ 해설자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4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5 ○ 그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 “누구를 찾느냐?”
○ 그들이 대답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요.”
8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9 ○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10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12 ○ 군대와 그 대장과 유다인들의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결박하고,
13 먼저 한나스에게 데려갔다. 한나스는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의 장인이었다.
14 카야파는 백성을 위하여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고 유다인들에게 충고한 자다.
15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님을 따라갔다.
그 제자는 대사제와 아는 사이여서,
예수님과 함께 대사제의 저택 안뜰에 들어갔다.
16 베드로는 대문 밖에 서 있었는데,
대사제와 아는 사이인 그 다른 제자가 나와서 문지기 하녀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갔다. 17 그때에 그 문지기 하녀가 물었다.
●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요?”
○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 “나는 아니오.”
18 ○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다.
19 대사제는 예수님께 그분의 제자들과 가르침에 관하여 물었다.
2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였다.
나는 언제나 모든 유다인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가르쳤다.
은밀히 이야기한 것은 하나도 없다.
21 그런데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이들에게 물어보아라. 내가 말한 것을 그들이 알고 있다.”
22 ○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곁에 서 있던 성전 경비병 하나가 예수님의 뺨을 치며 말하였다.
● “대사제께 그따위로 대답하느냐?”
23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24 ○ 한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카야파 대사제에게 보냈다.
25 시몬 베드로는 서서 불을 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 “당신도 저 사람의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오?”
○ 베드로는 부인하였다.
● “나는 아니오.”
26 ○ 대사제의 종 가운데 하나로서, 베드로가 귀를 잘라 버린 자의 친척이 말하였다.
●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27 ○ 베드로가 다시 아니라고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다.
28 사람들이 예수님을 카야파의 저택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그들은 몸이 더러워져서 파스카 음식을 먹지 못할까 두려워,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9 그래서 빌라도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나와 물었다.
● “무슨 일로 저 사람을 고소하는 것이오?”
30 ○ 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저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총독께 넘기지 않았을 것이오.”
31 ○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여러분이 데리고 가서 여러분의 법대로 재판하시오.”
○ 그러자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 “우리는 누구를 죽일 권한이 없소.”
32 ○ 이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가리키며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33 그리하여 빌라도가 다시 총독 관저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불러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34 ○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
○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35 ● “나야 유다인이 아니잖소?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소?”
36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37 ○ 빌라도가 물었다.
●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38 ○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진리가 무엇이오?”
○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다인들이 있는 곳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나는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겠소.
39 그런데 여러분에게는 내가 파스카 축제 때에
죄수 하나를 풀어 주는 관습이 있소.
내가 유다인들의 임금을 풀어 주기를 원하오?”
40 ○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외쳤다.
◎ “그 사람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주시오.”
○ 바라빠는 강도였다.
19,1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2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3 그분께 다가가 이렇게 말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4 ○ 빌라도가 다시 나와 말하였다.
●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5 ○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자, 이 사람이오.”
6 ○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성전 경비병들은 예수님을 보고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가 말하였다.
● “여러분이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목을 찾지 못하겠소.”
7 ○ 그러자 유다인들이 빌라도에게 대답하였다.
◎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8 ○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9 그리하여 다시 총독 관저로 들어가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은 어디서 왔소?”
○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0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11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위로부터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긴 자의 죄가 더 크다.”
12 ○ 그때부터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줄 방도를 찾았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외쳤다.
◎ “그 사람을 풀어 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
13 ○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리토스트로토스라고 하는 곳에 있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로토스는 히브리 말로 가빠타라고 한다.
14 그날은 파스카 축제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다인들에게 말하였다.
● “보시오, 여러분의 임금이오.”
15 ○ 그러자 유다인들이 외쳤다.
◎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여러분의 임금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이오?”
○ 수석 사제들이 대답하였다.
▣ “우리 임금은 황제뿐이오.”
16 ○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17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
그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타라고 한다.
18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을 가운데로 하여 이쪽저쪽에 하나씩 못 박았다.
19 빌라도는 명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달게 하였는데,
거기에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고 쓰여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도성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로 쓰여 있었다.
21 그래서 유다인들의 수석 사제들이 빌라도에게 말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이라고 쓸 것이 아니라,
‘나는 유다인들의 임금이다.’ 하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쓰시오.”
22 ○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오.”
23 ○ 군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그분의 옷을 가져다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몫씩 차지하였다.
속옷도 가져갔는데 그것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24 그래서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 차지가 될지 제비를 뽑자.”
○ “그들이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누어 가지고 제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습니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이 그렇게 하였다.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 이어서 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
+ “목마르다.”
29 ○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 “다 이루어졌다.”
○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무릎을 꿇고 잠깐 묵상한다.>
31 ○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35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36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37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38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39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40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
4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에는 아직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이 있었다.
42 그날은 유다인들의 준비일이었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그곳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1884년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친구인 헨리 힐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우리는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때 우리는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깊은 슬픔에 익숙하다고 털어놓으셨을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주의를 기울여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우리는 깜짝 놀라고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그분 부활의 신비가 희망과 함께 우리를 압도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시련에 더 친밀함과 일치를 느낍니다. 결국 우리는 주님께서 겪으신 수난과 죽음에서 자신을 깨닫고 우리 믿음의 불씨를 지피며 사랑으로 마음을 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예절인 성금요일의 주님 수난 예식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성찬 전례 없이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그리고 영성체 예식만 거행하면서, 날마다 보던 십자가도 가려져 있고, 제대 보도 치워져 있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고통받으시고 돌아가셨는지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결국 우리가 이 시간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십자가를 피하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자신을 버림으로써 우리는 주님 수난과 죽음에서 그분과 더욱 하나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구대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말없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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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금요일

주신 말씀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 30)

수난기 전문은 다음을 보세요.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의 날에 아버지께서 그러셨듯 저를 보시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에 들기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주변의 평판과 시선에 솔깃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시면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뒷전이고 때로는 내 생각을 주님의 말씀인양 포장한 적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이 행복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행복하고, 온유하고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 당신으로 인해 박해를 받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이 아니라 다른 행복을 찾아 기웃거리곤 했고 예수님 때문에 칭송받기만 즐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한을 품은 일들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두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마음, 저주하는 마음, 꺼려지고 섭섭한 그 마음을 그대로 두고 주님께 나갈 수 있다고 그래도 된다고 우기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좋은 처세술이라고 융통성이 있어야 한다며 예와 아니오를 뒤바꿔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도 희생할 때도 자선을 베풀때도 남에게 보이려 하지 말고 숨은 일을 보시는 아버지께서 보시도록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드러난 일만 보는 이들에게 보이기 위해 일하고 기도하고 겉으로 희생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수는 없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면서 하느님에 앞서 편안한 안락에 몸을 맡기며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고 변명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면서, 먼저 하느님과 그분의 의로우심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감당치 못할 문제라며, 어찌 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면 많은 시간을 근심하고 초조해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면서 나병환자에게 그러셨듯 제게도 손을 대어 치유하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며 아직은 때가 아니니 제 삶에 개입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버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맨처음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라 오라고 하시며 그러셨듯 제게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밤새 허탕치지 말고,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물질에 서툴러 자꾸만 다른 방향을 향해 그물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낚지도 못하고 오히려 있는 것마저 놓쳐버린 적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가 되려면 매일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버리지 못했고, 버리는 척 하다가 다시 쟁여 놓았습니다. 혀로, 입술로만 십자가를 지고 정작 져야할 십자가는 외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시며 저에게 자유롭게 살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나 댓가를 바라고, 인정을 바라고, 제 몫을 바라면서 당신이 주시고자 하는 자유를 잃고 묶여 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당신을 증언하면 당신도 하늘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증언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자신감없이 지내며 뒤로 숨을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밭만이 아니라,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씨를 뿌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게 친절하고 내게 미소짓고 내게 수월한 이들에게만 다가가면서 어려운 이들, 맘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멀리하며 좋은 사람에게 잘해주는 것만도 벅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하시며 온전히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평하고 탐욕을 품고 태연히 거짓되고 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잃고 헤매는 한 마리 양을 찾아 목자는 온 산과 들을 다 돌아다니며 기어이 다시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멀쩡한 양들도 나로 인해 신앙이 약해지거나 잃기도 했을 것이며 당신께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드실 겨를 조차 없이 많은 이들을 만나시며, 그들에게 가엾은 마음을 보이시고 가르치시고 먹이셨습니다. 그들이 목자없는 양들 같았기에 당신이 목자로서, 친구로서, 스승으로서, 아버지 안의 형제로서 다가가셨습니다. 그러나 삯꾼인 나는 가엾은 마음이 아니라 귀찮아하는 마음, 피하는 마음, 경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초대에 머뭇거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일 때 당신께 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메어주는 멍에는 편하고 당신이 지어주는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깊이 쉬기보다는 너무도 자주 얄팍한 기쁨을 찾으려고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듯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며 당신의 양떼를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주 주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그윽한지를 잊고도 태연했으며 너무 자주 섬김을 소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시몬 이스가리옷 유다의 팔아넘김만이 예수를 팔아넘긴 다가 아닙니다.
진리를 가리우고 부정에 야합한 대사제들과 지도자의 위선만이 예수를 죽음에 내어던지 책임의 총체는 아닙니다. 
새벽 첫닭이 울기전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려고 세 번이나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의 부인만이 주님을 부인한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를 결박하여 질질 끌고 다니며 그분을 뺨을 후려친 성전 경비병들의 행동이 그분께 끼친 모욕의 전부는 아닙니다. 나는 그와 그와 관련된 이 일에 아무 상관없다는 총독 빌라도의 회피가 그리스도께 등돌리는 모든 회피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는 무지한 유다인들만의 고함과 사형요구가 그분의 죽음을 초래한 책임의 다가 아닙니다.


온몸을 사정없이 내리친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만이 사람의 아들이 티도 흠도 없는 무죄하심에도 겪어야 했던 복수와 형벌의 전부는 아닙니다.  건장한 당신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넘어지게한 생나무 십자가의 무게가 주님의 어깨에 짊어진 시련의 전부가 아닙니다. 생살이 찢겨나가는, 당신 육신에 새겨진 오상의 치명적인 상처와 그분 입에서 터져나온 외마디 신음만이 나자렛 사람이 겪으신 이땅의 모든 처절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죽음의 처형지 해골산 골고타가 예언자가 죽음을 당한 유일무이한 장소인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나도 너도 그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팔아넘김이 있습니다. 진리의 가리려는 이땅의 어둠이 있습니다. 일신의 안락을 위해 기꺼이 부정과 야합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복음의 부인도 있습니다. 결박과 모욕도 있습니다. 후안무치하게 생명을 억누름도 있습니다. 나는 무관하다는 회피와 외면도 넘쳐납니다. 무죄한 이들의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존엄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죄악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힘없이 약한 이들의 신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지워버리고 몰아내려는 악의 준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높이 높이 매달리십니다. 저는 분명 십자가 앞에 유죄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무죄입니까?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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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가해 주님 만찬 성금요일

<그리스도께서 증언하신 진리란
십자가를 지지 않는 하느님 자녀는 없다는 것이다>  
 
복음: 요한 18,1-19,42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더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으로 진리를 증언하십니다.
 
우리나라 정식 첫 세례자는 1784년 북경 사신으로 갔다가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이승훈 베드로였습니다. 그전까지는 1777년부터 시작된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이끌던 이벽, 권철신 등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주교와 사제직을 맡아가며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이 보고 배우고 온 것은 사도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에 의해 서품을 받은 사제만이 성사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에 자리 잡고 있었던 김범우의 집 명례방에 모여 서학을 연구하고 천주교의 신앙을 전파했던 한국 초대교회 창설자들은 몇몇 유생의 고발로 사형에 처하게 되고 어떤 분들은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북경 주교의 명령대로 윤지충과 권상현이 대놓고 제사를 거부하여 1791년 그들의 순교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온 지 10년이 지난 1794년이 돼서야 겨우 중국인 신부 주문모 신부가 조선 사람으로 변장하여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집을 옮겨 다니며 성사를 집행하는데 주문모 신부의 거처가 발각되면 그를 모시던 회장들이 사제 복장을 하고 관아에 끌려가 대신 순교를 함으로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렇게 3명의 회장이 순교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강완숙 골롬바가 6년 동안이나 목숨을 걸고 주 신부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강완숙 골롬바까지 잡혀가 문초를 당하게 되자 주문모 신부는 마음이 약해집니다. 자신만 없어지면 자신 때문에 그렇게 많이 잡혀가 죽지 않게 될 것이고 오히려 신자들이 생명을 부지하여 천주교가 유지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목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그날 밤, 주 신부는 이런 묵상을 하게 됩니다.
‘양 떼는 목자를 위해 목숨을 바쳐 죽어갔는데, 목자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가?’

그리고 돌아와 의금부에 자진 출두하여, ‘내가 주문모 신부요!’하고 자수하여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그때가 1801년 4월 19일이니 주문모 신부는 약 6년간 조선교회를 위해 일하셨고 한국교회의 첫 사제순교자가 됩니다.

그 후 33년 동안 사제가 없는 암흑의 신앙생활을 하고 모진 박해가 있었음에도 신자 수는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조: 김길수 강의, 하늘로 가는 나그네]
 
주문모 신부님은 사제가 되기 전 결혼도 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의 행복도 알고 허무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에서 편하게(?) 사목 생활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그 압록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사제’라는 정체성, 신원 의식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사제다.’라는 정체성을 목숨으로 지켜내신 것입니다.
 
요한의 수난기에서는 두 인물이 대비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자녀임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임을 포기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물론 베드로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이 두 인물을 대비하며 하느님 자녀로서의 신원을 지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십자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바로 하느님 자녀는 십자가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빌라도에게 말씀해 주시려던 진리입니다. 유다인 입으로 이 진리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소. 이 율법에 따르면 그자는 죽어 마땅하오. 자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였기 때문이오.”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려면 죽어야만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 진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녀는 아버지의 뜻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피 흘림 없는 사랑은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위대한 성인으로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訶川要産)는 사생아로 태어나 아사 직전에 두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구출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음을 배웠습니다.

1909년 성탄절 전야에 그는 신가와 빈민굴 한 평짜리 오두막으로 이사하여 빈대와 벼룩이 우글거리는 그곳에서 고독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돈이 모자랄 때는 굴뚝 청소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자기 밥으로 죽을 쑤어 함께 먹었습니다. 불량배들에게 맞아 앞니 4개가 부러지는 핍박을 이기고 주일학교를 세웠으며 그가 휴지를 주워 쓴 소설 ‘사선을 넘어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그 인세를 모두 빈민들에게 나눠줬습니다.

1927년 일본 노조를 최초로 설립하였고 1929년에는 전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 군부에 항거, 투옥되었다가 종전 후 실명 상태에서 다시 빈민굴로 돌아와 사랑의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의 신조는 이것이라 합니다.
“당신 자신을 주시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피 흘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삶이 자신의 정체성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것처럼,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도 자신을 이웃에게 내어줍니다. 그러면 우리 살과 피가 이웃을 정화하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증언하신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사랑을 위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사람.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고,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https://youtu.be/vklS3SKXom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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