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6,14-25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2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주간의 시간이 흘러갈수록 주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세상 여러 유혹과 그 갈등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의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우리의 속마음까지도 성찰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거울을 보듯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를 다시금 읽어 봅니다. 이사야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고통받는 주님의 종이 어떻게 배신의 비열함을 넘어서는지를 노래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지친 이를 격려하라고 고통받은 주님의 종에게 혀를 주시고 귀를 일깨워 듣게 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서 받은 비열한 배신과 그에 따른 깊은 상처를 이겨 내게 한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배신 없이 주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화답송에서 부르는 오늘의 시편이 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형제들에게 낯선 사람이 되며 친형제들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더라도,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감사 노래로 기리며 그분만을 찾는다면, 진정 하느님께서는 배신으로 상처 받은 마음에 생기를 돋게 하시며 우리의 간청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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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간 수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6,14-25)
유다 이스카리옷은 젤롯당 출신이었답니다. 열혈당원이라고도 번역되는 그 정파지요. 피가 뜨거운 이들, 정치적 해방을 꿈꾸고 그런 메시아를 기다린 이들이죠. 저분을 통해 세력을 규합하고 저분을 통해 일을 도모하기를 기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카리옷 출신이랍니다. 제자들 절대 다수는 갈릴래아 촌구석(비하의 의미가 아닙니다^^) 출신인데 유다만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나름 도시 출신입니다. 일단 요새 말로 스펙은 괜찮아요. 이력이 남들에게 내세울 만큼 번듯한 거죠.
그런데 그런 그가 오늘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주님께 야속한 평가를 받습니다. 연전에 지금은 탄핵된 대통령을 귀태(鬼胎)라고 지칭해서 시끄러웠던 것 기억나시나요. 귀태가 그런 표현이죠. 없었으면 좋았을 존재, 성경 전체에서 아무리 악인이라도 이런 평가는 없어요. 그래도 그는 사도로 뽑힌 제자이지 않습니까. 당신을 따르던 수많은 이들 중에서 예수께서 철야 기도 하시고 고르고 골라 뽑으셨던 인물인데, 어찌 이렇게까지 정말 최악의 인물, 비극적 인물로 낙인찍혀 버렸던 것일까요.
예따사라고 있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이니셜을 딴 밴드였고 음반도 낸 생활성가 그룹입니다. 제자들은 예따사였습니다. 사도는 말할 것도 없죠. 예따사의 일원이었던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제 예수님도 포기하신 사람, 예포사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문제적 인물, 유다 그는 야망의 인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악한 자로 자리매김됩니다. 그는 능력이 있었음에도 그렇게 포기된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최악의 제자인 그는 악하고 유능한 이중성의 인물이었습니다. 세상은 선하지만 무능한 사람보다는 악하더라도 유능한 사람이 낫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결국 그것은 자기를 위한 유능이 되어서 세상을 망하게 하기 마련임을 우리는 숱하게 경험합니다. 물론 착하고 유능하면 더 좋겠죠. 누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유다가 배신할 줄은 다른 동료 제자들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건 진짜 대단한 것 아닌가요. 대개 보면 어른들은 다 속일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난 착한 수련자야’, 신학교에서 ‘난 괜찮은 신학생이야’, 사제로서 신자들에게 ‘난 열심한 신부야’, 장상들과 선생들과 신자들과 세상에 자기 자신이 착하고 괜찮고 열심하고 흠잡을 데 없는 자로 보여지게 살 수 있긴 합니다. 어렵지만 하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동료, 동기, 친구들만은 못속입니다. 절대로 못속입니다. 하느님과 친구들에게는 자기의 본모습을 감추는 것이 비슷할 정도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들마저 깜빡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죠. 정말 대단한 유다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배신자가 주변인들에게 그 누구보다 더 인격이 고매한 것처럼 보여지고 감추인 마각이 절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 그 능력을 쓰게 되는 이의 말로가 어떠한지를.
그렇게 악한 자였음에도 그는 티도 안나는 치밀함이 있었습니다. 어찌나 영리했는지 누구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죠.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당신을 팔아 넘기리라는 언질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누가 배신자인지를 몰랐다는 것이죠. ‘저는 아니겠지요. 혹시 저인가요?’ 그랬다는 겁니다. 아무도 유다가 그러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기를 잘 감추었습니다. 유다는 그만큼 치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셨습니다. 하여 회개의 기회, 다시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수차 그에게 주셧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 부은 이야기에서 유다가 착한 척은 혼자 다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한말씀 지긋이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혼자서 생각하는 척 하지 말라고! 또 앞서 제자들 발을 씻기시면서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다 깨끗하지는 않다- 그러셨습니다. 유다의 내면에 찔리는 말씀인 것이죠. 만찬 자리에서도 누군가 당신을 팔아 넘기려 한다고 암시를 주신 바 있습니다.
급기야 오늘 복음에서는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판다.’ 이제는 이름만 거명하지 않았지 다 드러난 것이죠. 대접에 빵을 같이 넣는 이가 바로 그다-이 정도면 이제 알아들을 법 한 것입니다. 그런데 못 깨닫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 꼭 찝어 주시기까지 했습니다. 속으로야 뜨끔했을는지 모르는데 아직도 모른 척합니다. 또 빵을 집어서 주기도 하셨는데 그런데도 그는 그 기회를 잡지 않습니다.
올리브 동산에 예수님 체포하려고 유다가 병사들 이끌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친구야. 할 일을 하라’ 그러셨습니다. 정말 마지막 기회입니다. 그럼 그때라도 어떻게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결국 그는 배신의 길로 갑니다. 숱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안 들었는지 못들었는지 듣고 싶지 않았는지.
인생은 한방에 무너지진 않더군요. 여러 번 기회가 있었는데 번번이 다 무시하다가 결국 결정타를 맞고 쓰러지는 것, 보통 그렇습니다. 그렇게 망하게 될 때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자기한테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내 해당사항이 아닌 것으로만 들립니다.
그러면 안되는 일이지만 가끔 누군가를 겨냥해서, 소위 저격 강론을 몇 번 한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좀 달라졌으면 하는 마지막 호소입니다. 정말 저 양반 저러면 안되는데 다른 방법이 다 무효일 때 최후의 수단으로 강론을 활용(?)합니다. 주님의 말씀 선포를 어찌보면 남용은 아니지만 슬쩍 이용하는 것이죠. 이 충고 내지는 조언, 혹은 호소를 저기 신자석에 앉아있는 그 양반이 꼭 들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그런데 미사 마치고 나면 그의 반응이 그럴 때가 많더군요. 일단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릅니다. 심지어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부님, 아까 그 얘기 누구한테 하신 겁니까?’ (물론 속으로) ‘누구긴 누구냐. 바로 당신이지, 이 양반아!’
그런데 돌려 말해도 안듣고, 직설적으로 말해도 안듣고, 아무리 해도 안 듣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히려 들을 필요 없는 사람들은 정말 다 자기한테 한 얘기라고 듣고 할 필요도 없는 통회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할 사람임에도 나는 아니라고 발빼는 이 난감함이란.
죽음의 길이라 하셨지만, 회개의 기회를 수없이 주셨지만 그저 그뿐, 결국 유다는 한 번에 망한 것이 아니라 점차 점차 망해간 것입니다.
누구한테 말씀하시는 걸까? 궁금하거나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 아니고 저이한테 하신 거겠지.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나한테 하신 말씀 아닐 수 있을지라도 마치 나한테 하신 것처럼 들으면 유익합니다. 그러면 그 다시 돌이킬 기회,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주님이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그렇게 벌써 여러 번 하셨다면 아마 우리에게는 남은 기회는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지나면 예포사, 예수님도 포기한 사람이 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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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성주간 수요일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맛’이 있다>
복음: 마태오 26,14-25
많은 중독자가 있습니다. 일 중독, 알코올 중독, 도박 중독, 성(음란) 중독, 권력 중독, 돈 중독, 게임중독, 스포츠 중독… 등. 그런데 왜 그런 중독이 자신을 망친다는 것을 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그것에서 주는 만족을 그것에서 벗어나는 만족보다 더 크게 보기 때문입니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는 도박 중독에 빠진 어느 평범한 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앤지 버크만은 측량사인 남편과 두 딸을 키우는 중년 여성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출가하고 남편은 여전히 일에 바쁜 상태여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무의미한 존재란 생각이 밀려왔습니다. 결국은 혼자라는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해 카지노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몇만 원, 크게는 몇십만 원 이상은 도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박할 때, 특별히 돈을 딸 때는 자신이 좀 특별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습관이 되어 그동안 모은 돈을 다 날리고 파산신청을 해야 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앤지는 파산한 지 3년 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약 11억 원의 유산을 받게 됩니다. 도박을 싹 끊기 위해 그 돈으로 도박이 불법인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고객을 잃을 수 없었던 카지노 측에서는 교통비와 숙박비, 그리고 약 천만 원의 칩까지 서비스로 제공하겠다는 말에 ‘그것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다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유산 11억을 다 날린 것은 물론이요, 집까지 저당 잡히고도 약 4억 원 상당의 빚 독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솔직히 누구든 내 입장이었다면 똑같이 했을 거라 생각해요.”
왜 중독을 끊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맛’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데도 맛이 있습니다. 구약에 에사우는 야곱이 제공하는 불콩죽에 자신의 장자권을 팔았습니다. 우리가 공부해야 하는 것은 과연 불콩죽의 행복을 장자권을 희생하면서까지 팔아넘기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가리옷 유다처럼 은전 삼십 냥을 선택하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을 포기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들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왜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할까요? 그 이유는 ‘나’의 정체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육체는 땅으로 만들어졌고 영혼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육체는 땅의 행복을 추구하고 영혼은 하늘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를 ‘나’로 정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라고 믿으면 은전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기게 됩니다. 육체의 행복이 우선시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영혼으로 생각하면 영혼의 행복을 위해 은전 삼십 냥을 포기하는 고통을 감수합니다. 물론 은전 삼십 냥을 포기하는 고통으로 얻어지는 것은 영원한 행복입니다. 육체의 행복은 짧은 맛과 오랜 고통을 수반합니다. 반면 영혼의 행복은 짧은 고통과 오랜 행복을 보장합니다.
요즘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새롭게 일상에서 겪게 되는 우울증을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울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우울함보다는 기쁨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 시간을 기회로 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울함도 내가 선택하는 삼십 냥일 수 있습니다. 시간이 많으니 한 달 동안 악기를 배워볼 수도 있고, 소설을 한 권 쓸 수도 있고, 드라이브하면서 찾아뵙지 못했던 부모님을 찾아뵙고 친교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상황에서 굳이 더 우울한 것을 선택하는 이유는 자신의 몸의 행복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전 삼십 냥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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