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성주 간을 앞두고 주님 수난에 함께할 준비의 필요성을 오늘 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솔로몬 사후 분열된 왕국의 재통일에 대한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다윗을 유일한 목자와 제후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예언과 함께 이 재통 일된 왕국의 평화로움이라는 영원한 계약으로 이어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성전과 거처를 그 백성 가운데 두시어 그제야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게 된다는 희망을 안겨 줍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회를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최고 의회는 세속 권력과 많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과 하나 됨을 거부합니다. 특히 카야파 대사제는 기회주의적 발언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말썽을 일으키는 자를 제거하려 합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내어놓음으로써 민족에게 이익을 가져온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제키엘의 예언이 대사제와 최고 의회가 원하지 않는 하나 됨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목자와 제후로서 민족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죽음은 널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또한 하나로 모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주 간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카야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가, 아니면 예수님과 하나 됨을 진정으로 바라는가?’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 가해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2020년 가해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자세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다>
복음: 요한 11,45-56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알타반은 그리스도와 함께 미소를 띤 얼굴로 평화로이 눈을 감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당신께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에게 그것의 참 주인은 당신이었음을 알려주시기 위해 비교할 수 없는 은혜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선악과를 자신의 것인 양 여기는 것이나,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생명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것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참 주인을 몰라본 덕에 부활의 상급은 받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들어온 죽음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인류를 위해 당신 목숨을 내어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자신의 것인 양 지키려고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가야파 대사제의 입으로 이 진리를 말씀하도록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살려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자신들의 것인 양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을 다시 받을 공로를 쌓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세상은 이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생명을 대하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과 유다인들처럼 대하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심판도 그렇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요즘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다시 ‘만민구원설’과 같은 이단적 사상이 자라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보다는 부활에 더 집중하려는 모습입니다. 죽음 후에 지옥에 단 한 사람도 머물지 않고 다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희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 후가 아니라 바로 그 죽음을 어떠한 자세로 대하느냐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로마로 순교를 당하기 위해 압송당하던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는 자신의 죽음을 마치 천국에 들 수 있는 특권인 양 방해하지 말라고 로마 신자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 내 지상의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 나는 하느님을 뵙기를 원하며,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참조). 그분과 이웃을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는 삶이 그것을 돌려받을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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