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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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사순 제5주간 금요일 (2020.4.3.)

by honephil 2020. 4. 3.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겨냥한 유다인들의 집단 폭력의 곤경에 빠지십니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좋은 일’이 오히려 당대의 종교 관습과 제도에서 비롯된 정치 세력에게 위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영원한 생명을 알려 주시는 예수님의 ‘좋은 일’이 두려워 그분을 신성 모독으로 단죄하며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돌을 든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확실히 알려 주십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81],6).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신성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믿는 이가 지니는 신적인 권위는 하느님께서 증명하셨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율법을 인용하신 것은 유다인들과 대립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인을 넘어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신이 되고 신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하느님의 자녀’의 지위로 올려놓으십니다.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하신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사순 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좋은 일’이란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박기석 사도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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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요한 10,31-42)

20세기의 위대한 사회철학자 중에서 위르겐 하버마스라고 있어요.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한 사회를 새롭게 조직할 것인가를 국민 주권의 이념아래 재구성하려고 하는 아주 거대한 목표를 주장한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입니다. 하여간 그가 주창한 개념중에서 인식주도적 관심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뭐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식주도적 관심은 거칠게 말하자면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더라는 거죠. 대상에 대한 이해, 인식이란 결국 독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특정한 관심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볼꺼야! 보고 싶은 대로 볼꺼야! 
이런거죠. 제가 부양하고 교육하는 책임을 맡은 우리 패밀리, 앵무새들이 있죠.  친구들, 어디 아픈데 없나 살펴야되고 기분은 어떠신가 돌봐주어야 하고 매일같이 청소해주고 한주에 한번 목욕 시켜주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나 봐줘야 하죠. 품이 너무 많이 들어요. 뭐하러 이짓을 하나 그런 생각도 들때가 있어요. 아이를 낳아 키워도 중고등학교만 보내도 대충 제 앞가림은 하는데 이 친구들은 향후 몇십년은 제 차지입니다. 후회가 막심해요. 날려버릴까? 좋아하는 건 한 순간이고 귀찮은 것은 영원하다니까요. 그렇지만 어떡하겠습니까? 어떻든 내 품에 들어온 녀석들이니 그러니 관심을 쏟기 마련. 그런데 이 관심이 자꾸만 무엇인가를 알게끔한다는 거죠. 이것들이 미네랄을 보충해야하니까 굴껍질을 사서 주는데 이걸 잘 안먹고 다 헤쳐놓기만 합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만 계란으로 대치하면 좋데요. 그래서 아침에 나온 계란껍질을 줘봤더니 곧잘 먹더라구요. 아무 쓸모없던 계란이 유용하구나. 꼭꼭 챙겨가죠. 그리고 또 계란은 가끔 속껍질 붙어서 소화에 안좋은데 갑오징어 뼈가 좋다하더군요. 그래서 갑오징어로 대체했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자꾸 보게 된다는 거에요.

신학교때부터 골골하던 친구가 있습니다. 별명이 움직이는 종합 병원이에요. 그 친구한테 가서 보면 별별 해괴한 건강 식품과 운동기구를 보게 됩니다. 발목펌프가 그렇게 좋다네요. 반신욕할때는 이렇게 해야 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친구 별명이 보신이에요. 보신 신부, 웰빙사제에요. 왜 그렇게 되었느냐? 건강에 대한 그의 관심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죠.
그런데 관심, 그것은 무엇인가를 더 알게끔 만들기도 하는데 또 많은 경우에는 앎을 제한하기도 하죠. 관심없는 것, 관심 영역 바깥의 것은 잘 안보게 되는 거에요.
스포츠에 관심 없으면 누가 금메달을 따든 말든, 프로야구를 시작하던 말든 상관없죠. 관심이 없거든요. 내 관심 밖의 영역이니까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관심이란 결국 편견의 다른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거기에 맞추게 만들기도 하는 것이죠. 

유다인들의 관심 혹은 편견은 이미 예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를 어떡하든 몰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이려는 음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말씀도 보여주신 행적도 다 싫은 거죠. 이제는 왜 싫은지도 애초의 이유가 희미해졌어요. 무작정 싫어하고 배척하고 몰아내도록 그렇게 관심이 굳어져 버린 것이죠.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에 돌을 던지려는 것이요.’ 예수님은 그들의 관심사인 율법의 논리를 들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 것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하십니다만, 이 설득은 결국 통하지 않습니다.

이미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가차없는 이 단정이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관심이 분노이니 결과는 죽음이었단 것이죠.
단정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나의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것이죠. 다른 정보에 대해서는 내 주장에 어긋나는 것은 합리적이고 귀담아 들을만 한 것이라도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주장의 강화만 일어납니다. 다른 의견에 대해 경청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편협하게 몰고 가는 것이죠.
유대인들이 본 예수님은 실제 예수님과 무관한 허상이었습니다. 관심이 인식을 과도하게 주도해버린 폐해인 것이죠. 실로 내가 보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물론 (내가 본 그래로) 그럴 수도 있죠.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단정한 순간, 우리 인식의 부패가 일어납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런 한계의 인정이 관계를 넉넉하게 만들죠. 이것이 다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이상하다고 보기 전에 나도 이상할 수 있음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조금은 쉽지 않은 사람들 아닌가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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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모든 죄는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복음: 요한 10,31-42

저는 키 작은 열등감이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누구도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잘생긴 연예인들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이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요?
 
‘더 리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 가다가 열병에 쓰러진 10대 소년 마이클을 30대의 한나가 구해 정성껏 간호해 줍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합니다.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면 한나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립니다. 한나는 마이클의 장래를 생각해서 조용히 마이클을 떠납니다.

그로부터 8년 후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전범 재판을 참관하던 중 옛 연인 한나가 전범으로 몰려 재판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녀의 혐의는 수용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일상을 기록해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은 문맹인 한나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의 무죄를 확신합니다. 그런데 한나는 순순히 자신이 한 일로 인정하고 20년형을 선고받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죄짓게 만드는 무기가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저는 ‘열등감’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열등감이 있다면 사탄은 그 열등감을 극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이유로 온갖 악한 행동을 부추길 수 있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된 이유도 이 열등감 때문이었습니다. 뱀은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된다.”(창세 3,5)

뱀은 하느님처럼 되게 만들기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하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꾀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간이 처음부터 당신처럼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신 모습대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교리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398)

‘신화’란 하느님처럼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하느님처럼 되도록 창조하였지만, 인간이 이것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에 손을 댄 것입니다. 선악과는 자신이 이미 하느님처럼 되었음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느님처럼 되어보려는 사람에 의해 강탈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더는 죄를 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방법은 이 열등감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하수인들은 이 가르침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이 하는 노력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460) 이를 위해 인간이 되셔서 믿음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어야 하셨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누구든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저의 키 작은 열등감은 죄의 원인이었습니다. 유럽에 나가서 공부하다 보니 그 열등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왠지 무시당하는 느낌에 ‘그래도 공부는 내가 더 했지’, ‘작으니까 더 민첩하지’ 등으로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웃을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죄입니다. 나폴레옹도 자신의 키 작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세계 정복을 꿈꾸었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전쟁에 휘말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곧바로 사탄의 하수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밀떡이 당신과 같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씀을 받아들이고 성체를 영하면 더는 높아질 수 없는 수준이 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 믿음만이 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방에 들지 않겠어요.”
켈리 여사가 호텔 직원에게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가구 하나 없는 이 게딱지만 한 방에서 자면서 그 많은 방값을 지불하진 않을 겁니다. 내가 촌에서 올라왔다고 깔보는 모양인데….”
“부인 일단 타세요.”
직원이 그녀의 말을 자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부인의 방이 아닙니다. 엘리베이터라고요!”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는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자라고 해도 화가 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만 계속 자존심 때문에 죄에서 허우적대며 자신을 높이려 하다 불행하게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 가해 사순 제5주간 금요일

https://youtu.be/HVnejR5Qj5A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 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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