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202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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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사순 제3주간 토요일 (2020.3.21.)

by honephil 2020. 3. 21.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9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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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제사를 떠올립니다. 성전에서 바치는 예배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은 제사만 드리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기록들이 성전을 기도하는 장소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감실에 모셔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기도하고 성체 조배를 하는 것처럼 유다인들도 성전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집으로 생각하고 그곳을 찾아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명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며” 기도를 바칩니다. 그는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기에 하느님 앞에서 “꼿꼿이 서서” 기도합니다. 감사 기도이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하고 그들의 죄를 향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자비를 청합니다. 그의 눈은 자신을, 하느님 앞에서 한없이 부족한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의 대화입니다.


의롭게 되어 돌아간 사람은 세리입니다. 의로움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꾸어서 이해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쟁취하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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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사순 제3주간 토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9-14)
 
무슬림들이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하듯 정통 유다인들에게도 정해진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3시입니다. 그 시간 모든 것이 멈추고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이죠.
오늘 비유는 다른 이들을 업신여기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대비됩니다. 그들의 기도가 묘사됩니다. 바리사이에 비해 세리는 존경받기에는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가 성전에서 홀로 기도합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리가 별도로 있습니다. 종교적 특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도하나요? 다른 이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보다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그 열등한 이들에 비해 얼마나 대단하지를 하느님 앞에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리는요? 기도할 자격조차 없는 자로 자처합니다. 부끄러움으로 하느님 앞에 눈을 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돌아갈 때 의롭게 된 이, 하느님께서 인정하신 이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였다는 것이죠. 세리가 의롭다니? 이것은 당시 인식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롭다하신 이는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 다를 수 있습니다. 평가 기준이 우리와는 간극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와 권선징악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느님의 깊으심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죠. 세리가 의롭다니? 이 말씀을 들은 이들에게는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이죠. 세리가 의롭다니? 자기가 부족한, 터무니없는 죄인임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다른 길은 없는 것이죠. 내가 도저히 의로움에 이를 수 없는 가련한 존재임을 알게 되면 하느님 앞에 무너집니다. 다윗이 바쎄바와의 간음한 후, 나탄 예언자가 그의 죄악을 꾸짖을 때 다윗은 깨닫습니다. 만천하에 드러난 자신의 죄상 앞에서 그는 비로소 무릎 꿇습니다. 그제야 자신의 왕권이 아니라 자신의 죄악이 하느님 앞에 드러날 때 하느님의 용서를 만나게 되는 것이죠.

바리사의의 기도는 자랑으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납니다. 세리의 기도는 고백으로 시작해서 요청으로 끝납니다. 용서를 간절히 구하는 그 마음, 멀찍이 떨어져서 감히 하느님을 바라볼 수도 없던 그 마음. 그런데 그 마음이 역설적으로 교회 안에서 얼마나 희미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쌓아가는 의로움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자비에 운명을 거는 것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누가 자격이 있습니까? 당당하게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이가 아닙니다. 부당한 자로 스스로를 깨닫고 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이가 들어갑니다. 의롭게 사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당한 삶이었음을 아는 것이 그래서 긴요한 것이죠. 그러니 부당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이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구원은 당당하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민망하게 받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바라보면 도저히 하느님을 바라볼 수 조차 없는 존재임을 알지만 달리 방법이 없기에 하느님 앞에 민망하게 서 있는 자, 세리의 그 믿음이 간직되기를 청합니다.    

남상근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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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사순 제3주간 토요일
 
 
<내가 반응하는 대상이 나의 수준이다>
 
복음: 루카 18,9-14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소크라테스만큼 유명했던 인물이 그의 아내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악처로 유명했습니다. 그날도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소크라테스의 머리에 물을 퍼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머리를 닦으며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너무 놀라지 말게. 천둥이 친 후에는 비가 내리는 법이라네.”
아내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도 너무나 태연한 소크라테스도 문제는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더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아내의 분노에 초연할 줄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또한 본받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만약 그때 맞서 싸웠다면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라기보다는 아내와 같은 수준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스로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사이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자비만을 청하는 세리도 나옵니다. 바리사이는 세리 같은 사람들보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자신의 자세를 뉘우칩니다. 바리사이는 이웃보다 잘살고 있으면 잘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이웃보다 잘살고 있음을 알려면 이웃을 평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비교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그를 깎아내리면 참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 세리는 바리사이가 뭐라 해도 발끈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원래 부족한 인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라고 하십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타인의 심판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그냥 그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내가 타인을 심판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언제나 부족한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이 당신을 심판한다고 분노에 차서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심판받으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의 의미는 당신께서 다른 수준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반응하면 같은 수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완전히 하느님의 본성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도 육체의 인간으로 살고 있어서 세상의 심판에 아주 무관하게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그렇더라도 자주 내가 사람의 자녀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하며 이웃의 심판에 자유롭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오래전 미국의 홀트 이반 판사는 살인을 저지른 27세의 한 여인에게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 아파했습니다. 살인의 동기가 너무 사소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이웃과 한화로 100원도 안 되는 5센트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총으로 상대를 쏘았던 것입니다.

5센트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수준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수준에 맞게 살고 죽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 반응하는 수준이 아니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5센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듯 그러한 수준의 사람들이 사는 삶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반응하는 대상을 보고 내가 어느 수렁에 빠져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빨리 믿음의 줄을 잡고 그 수렁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내가 무엇에 반응하는지 항상 살핍시다. 자신을 보고 짖는 개에 반응하면 자신도 개가 될 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 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함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
정상연합회  기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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