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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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두 인물을 대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부유하고 호화롭게 살았던 “어떤 부자”와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던 “라자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고 죽음 이후의 모습도 대조적입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지만 부자는 불 속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죽음 이후의 세상이 현세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현세에서 고통을 받던 사람은 위로를 받고, 편하고 즐거운 생활을 하였던 사람은 고통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비유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첫째는 재화의 문제입니다. 루카 복음은 부와 가난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집니다. 잔치를 벌이며 호화롭게 살았던 부자와 그 집에서 구걸하지만 먹을 것을 얻지 못하는 라자로의 대조는,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가난의 문제에 대한 지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또한 재화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합니다.
둘째는 가르침의 실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내용은 이미 구약 성경에도 나와 있었습니다. 예언자들도 하느님의 길로, 정의의 길로 돌아오도록 호소합니다.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가르침을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듯이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공동체 안에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과 재화는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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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해지려는 의도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목적지 없이 표를 끊는 사람과 같다>
복음: 루카 16,19-31
한 추장이 나이가 들었습니다. 그는 세 아들 중 하나에게 추장직을 물려주기로 했습니다. 추장은 아들들을 데리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추장 일행의 눈앞에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습니다. 그 나뭇가지에는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세 아들에게 각각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는가?”
장남이 먼저 대답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나무가 보입니다.”
이번에는 차남이 대답했습니다.
“거대한 나무와 나뭇가지에 앉은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매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는 뭐가 보이느냐?” 그러자 막내가 대답했습니다.
“독수리의 두 날개와 그 사이의 가슴이 보입니다.”
“그러면 그곳을 향해 화살을 쏘아라.”
막내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에 명중했다. 그리고 추장직은 막내에게 돌아갔습니다.
하늘나라를 얻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거지는 천국으로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와 거지의 개념은 지금 가진 재산의 양에 따른 것이 아니라 ‘내어주려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옥으로 가는 부자는 자신의 집 문 앞에 항상 거지 라자로가 있었는데도 배를 채울 음식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자로는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개들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종기를 핥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이웃을 사랑하여 가난해지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부자가 되려 하건, 가난하게 되려 하건 두 의도 중 하나를 선택하여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마치 모기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자신이 살려면 남은 죽여야 하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처럼 되려는 사람은 이웃을 살리기 위해 피 한 방울까지 내어주려는 마음으로 삽니다.
오늘 복음은 사실 부자가 지옥 가고, 가난하면 천국 간다는 것이 주제가 아닙니다. 바로 ‘성경’을 어떠한 의도로 읽어야 하는지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타나게 하여 형제들이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는 형제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 때문에 형제들까지 지옥에 오면 그들의 괴롭힘에 의해 고통이 가중될 것을 걱정해서라고 보아야 합니다. 형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지옥에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모세와 예언서는 ‘성경’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성경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도 지옥에 떨어지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주십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의 피까지 내어주는 삶을 가르치십니다. 결국, 거지 라자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이웃을 위해 가난한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표지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지를 원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읽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목적이 명확해야 하늘나라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거지 라자로처럼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성경을 읽는다면 이는 목적지 없이 버스표를 끊겠다고 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목적지를 알고 표를 끊어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건강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운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에서 지려는 마음으로 훈련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으려는 의도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은 그 목적지에 다다르게 하는 표지판이 되어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 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함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
정상연합회 기도문
천주교서울대교구장인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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