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20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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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2020.2.28.)

by honephil 2020. 2. 28.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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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단식해야 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 때문에 체포당하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은 언제일까요? 혼인 잔치가 예수님과 우리의 참된 일치를 상징한다면, 신랑을 빼앗기는 순간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현존이 사라진 순간이 아닐는지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정이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사라진 순간이 바로 신랑을 빼앗긴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랑을 이 세상에 당신의 삶 전체로 알려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혼인 잔치”와 “신랑을 빼앗길 날”이라는 표현을 우리 삶에 적용할 수 있다면, “단식”에 대해서도 폭넓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만이 단식이 아니라,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단식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지나치게 내세우기보다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할 수도 있고, 시간을 들여 다른 이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경솔한 충고나 자기주장을 말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소리를 기꺼이 들을 수도 있고, 우리가 소유한 것들을 내놓아 자선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단식들은 세상에서 사랑의 불씨를 다시 일으킬 것이며, 더 많은 이들을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참된 일치의 잔치로 불러 모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체중 관리나 건강을 위하여 단식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단식을 보여 줍니다.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우리는 그러한 단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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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웃이 신랑처럼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으면 단식해야 할 때이다>
 
복음: 마태오 9,14-1

미국의 존 머레이는 한 푼의 돈도 헛되게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어느 날 머레이가 밤늦도록 독서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켜놓은 촛불 2개 중 하나를 끄고 정중히 할머니를 맞았습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할머니는 겸연쩍게 말했습니다.
“선생님께 기부금을 부탁하려고 왔어요. 거리에 세워진 학교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며 간곡히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는 돕겠다는 대답과 함께 5만 달러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뜻 거액을 기부하겠다는 말에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조금 전에 촛불 하나를 끄는 것을 보고 모금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거액을 기부하겠다니 기쁘고 놀라울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머레이가 대답했습니다.
“독서를 할 땐 촛불 2개가 필요하지만 대화할 때는 촛불 하나면 충분하지요. 이처럼 절약해왔기 때문에 돈을 기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절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절제를 통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하느님은 절제하고 단식하는 것 자체로만은 칭찬을 해주시지 않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은 잘못된 단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나를 작게 만들어 이웃을 크게 보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웃을 판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면 단식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작게 보고 자신을 찾아와 주는 사람들을 감사하게 맞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기 위해 단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주 단식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단식은 자신을 작게 만들어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인데 이들은 단식하는 것으로 이웃을 판단하니 잘못된 단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커지는 단식은 거짓 단식입니다.

성녀 글라라 수녀는 부잣집 딸이었지만 수도원에 들어가서부터는 일부러 딱딱한 나무 침대 위에 잤으며, 목과 손목에는 꽤 묵직한 쇠 목걸이와 손목 거리를 달고 잤다고 합니다. 한 번은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만 성이 나서 자기도 상대를 비판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다음 순간에 클라라는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바늘로 혀를 두세 번 찔러 사흘 동안 말을 못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단식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단식은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우리의 신랑이 아니실 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랑이신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신랑이시라면 나는 그분의 뜻을 따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누가 신랑이 함께 있는데 신랑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있다면 단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웃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이웃을 심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랑을 빼앗긴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웃 모두가 나의 신랑처럼 여겨질 때까지 어쩌면 우리는 꾸준히 단식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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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주변인들조차 예수님께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딴지를 거는 데, 어떻게 보면 주님은 이 반대를 즐기시는 듯도 보입니다. 단식에 대한 궁금함으로 요한의 제자들이 던진 질문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에 대한 궁금함은 의아함이 숨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좀 이상하다는 의혹의 눈초리가 엿보입니다. ‘저 사람들 우리와 좀 다른데 이상하지 않아’ 그런 생각입니다.


적대적인 일들이 벌어질 때 그 적대적인 상황이 오히려 진리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장애물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아니라 뛰어넘는 무엇이 되기도 합니다. 육상 단거리 경기 중 제일 짧은 거리는 100 미터 경주입니다. 그다음은 110 미터 허들 종목입니다. 100 미터는 그냥 휙 목표를 향해 달려가면 끝나기에 순식간이라 별 재미는 없죠. 110 미터 허들은 좀 다릅니다. 달리는 주로 에 10개 허들이 놓여있고, 선수들은 우아하고 박진감 있게 허들을 넘습니다. 인생은 100 미터 달리기가 보다는 110 미터 허들에 좀 더 비슷합니다. 장애물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허들 경기에서 허들을 넘지 못하고 쓰러뜨리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이 규칙을 알고 좀 의아했습니다. 허들을 넘지 못하고 죄다 쓰러뜨려도 탈락이나 실격이 아니란 것이죠. 10개 다 쓰러뜨려도 탈락이 아니고 10개 다 쓰러뜨려도 일등으로 들어오면 금메달이라더라고요. 결국 장애라는 것이, 우리의 실패와 좌절이라는 것이 결승점에 도달했다는 결과를 취소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다는 공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답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단식만이 전부가 아니고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경계해야 할 것 결국 어떤 원칙도 고착되어서는 안 되고 신앙이나 영성도 획일화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주변에 권고합니다. ‘나는 그것이 제일 좋았어. 그 프로그램을 이수했는데 나는 행복했어. 그러니까 너에게도 좋을 거야.’ 아닙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시켜서 그것을 획일화시킵니다. 이런 묵상이 너무 좋다 해도 저런 기도법도 있는 법입니다. 나의 이런 체험이 참 좋았으나 나와 너무 다른 저런 체험도 있는 것이죠. 다 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딱 한 가지만으로 전체를 다 재단하는 그것이 우리가 더 성장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분위기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죠. 단식이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니고 축제의 시간이라는 말씀. 그래서 분위기만 파악해도 성공가능성이 엄청 높아진다잖아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흐름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닌 말로 서로 모여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혼자서 갑자기 딱 들어와서 ‘지금이 놀 때냐. 우리 기도하자’ 이러면 분위기 흐립니다. 기도는 좋은 것이지만, 전체 흐름과 맥을 같이해야지, 독불장군이 되면 그 타이밍을 살리지 못합니다.

  
가끔보면 꼭 이상한 신심 가진 이들이 있습디다. 성탄 시기인데 십자가의 길 부득부득 바칩니다. 나쁜 것 아니죠. 그러나 격에 맞지는 않죠. 사순 시기인데 맨날 환희의 신비만 바칩니다. 그것은 뭔가 어색한 것이죠. 분위기가 그게 아니잖아요. 영혼이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왜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어떤 시간인가 파악하는 능력, 눈치라고 할까요 그것도 하느님이 주신 은혜라면 은혜가 아닐까요.        

남상근 라파엘 신부

 

 

[ honephil 생각 ]

 

오늘 남상근 라파엘 신부님 묵상글에 110미터 허들 얘기가 나오니, 생각나는 일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저도 이 허들을 체육 시간에 배웠습니다. 그런데 전 나름 제대로 한다고 했는데, 그걸 가르쳐주시는 체육 선생님이 자꾸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좀 더 성의를 다해서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연습이 끝난 후에는 이 허들로 실기 시험을 봤습니다. 실기 시험 결과는 따로 알려주시기 않았기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나중에 필기시험과 합쳐진 결과를 보니 그다지 높은 점수는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 저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정확히 알기 위해 나름 자료를 찾아보고, 선수들의 경기 동영상을 보면서 어떻게 하는 지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가 뭘 잘못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얼마나 빨리 허들을 넘는가가 관건인데, 이때 허들을 훌쩍 뛰어넘는 게 아니라 마치 허들이 없는 듯이 다리를 최대한 뻣어서 그 허들을 재빠르게 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넘는 역할을 하는 다리를 마치 넓이뛰기 하듯이 뻣는 게 중요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요령을 터득을 하지는 했지만, 저에게는 다시는 허들 실기 시험을 볼 기회는 없었기에 좀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막연히 성의를 다해 보라는 체육 선생님이 좀 야속하기도 했습니다. 정확히 요령을 가르쳐주고 그걸 따라 하라고 해야지 도대체 성의를 다해 보라는 식의 교육은 무엇인지, 그것도 몸으로 뭔가 동작을 해야 하는 체육을 성의를 다하라니...

이제는 좀 시간이 되었지만, 오늘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 몇 자 적어 봤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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