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 8,21-30) - 사순 제5주간 화요일 (2025.4.8.)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내가 인정받지 못함을 오히려 즐겨야 하는 이유 >
우리가 사는 공동체는 각자의 사랑의 수준이 있습니다. 만약 그 수준에 미달하거나 그 수준을 초과하면 추방당하거나 박해당합니다. 만약 가정에서 하느님과 같은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남편이 월급을 오다가 거지에게 다 주고 왔다면 가정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까요? 혹은 자신은 벌지 않고 아이들을 앵벌이를 시킨다면 그런 가정을 가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에서 가정처럼 요구하거나 내어준다면 회사에 맞지 않습니다.
가정에는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주 40시간을 넘기면 안 됩니다. 가정이라 생각해서 사장이 돈도 안 주며 노동시간을 강요한다면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모기떼가 있는 곳에서 혼자 피를 내어주겠다고 하면 바로 피가 빨려 죽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가파와 같은 곳에서 혼자 착한 척하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각 공동체가 그 안에 속하기 위한 사랑 수준의 범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면 내가 박해당해도 괜찮고 오히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방법이 박해당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동화에서 공주의 병을 고친 삼 형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자를 공주와 혼인하게 하겠다는 방이 붙었습니다. 세 형제는 아버지가 가보로 물려준 보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무리 먼 곳도 볼 수 있는 망원경으로 그 방을 보았습니다. 둘째가 나는 양탄자로 형제들을 궁궐까지 오게 하였습니다. 막내는 어떤 병이든 고치는 명약인 사과를 공주에게 주었습니다. 누가 공주와 결혼하게 되었을까요? 각자가 공주와 결혼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지만, 자기 것을 다 내어놓은 막내가 공주와 결혼하여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여전히 자기 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물이 없다면 형제간에서는 가보로 내려오는 보물을 없애버렸다고 막내가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에 막내가 신분 상승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이해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박해받을 때도 용기를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맞는 사랑의 수준이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들어 올려져야 하셨습니다. 그런데 들어 올린 이들이 그분을 들어 올린 후에야 알아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막내는 가문의 뜻보다 더 높은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가문에서는 버려질 수 있어도 새로운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사랑을 따르는 이들은 ‘부활’이라는 보상받습니다. 회사에서 회식을 하도 자주 해서 집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 걱정되어 박해받으면서도 빨리 들어가려 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흐를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로부터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직원을 박해한 사람들은 가정이라는 세상에 속하는 게 더 행복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박해받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분통을 터뜨리지 맙시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는다는 말은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박해를 약속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박해받으면서도 벌써 부활을 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비로소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은 수준이 아님을. 회개하면 좋은 것이고 아니면 그만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며 천국의 행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더 큰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는 들어 올려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들어 올려진 십자가의 모습이 그들에겐 또한 심판이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탁발 수도회를 세우겠다고 교황을 찾아왔을 때 교황은 그를 내쳤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수도자들을 보면 자신들에게 눈엣가시처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받는 가운데서도 행복했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고 주님은 교황의 꿈에 무너지는 교황이 머무는 성당을 어깨로 받치고 있는 거지를 보여주십니다.
교황은 그 거지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수준이 아님을 알고는 수도회를 허락하고, 지금 어떤 수도회보다도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교회에서까지 박해받는다면 기뻐해야 합니다. 교회를 쇄신할 인물로 선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cYVpyR_TtiI?si=NmDrI9aTXQFW0cFR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8,23
I do not belong to this world. Jn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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