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코 3,1-6)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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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코 3,1-6)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4.1.17.)

by honephil 2024. 1. 17.

[묵상]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코 3,1-6)  - 성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 (2024.1.17.)



안토니오 성인은 3세기 중엽 이집트 코마나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날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마태 19,21)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감화되어 자신의 많은 상속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막에서 은수 생활을 하였고, 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는 세상의 그릇된 가치를 거슬러 극기와 희생의 삶을 이어 갔으며, '사막의 성인’, ‘수도 생활의 시조’로 불릴 만큼 서방 교회의 수도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356년 사막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는 길: 행복의 변덕쟁이가 돼라 >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는지, 않는지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분을 고발하여 죽이는 것이 그들 목적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지, 죽이는 것이 옳은지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안식일 법이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있음에도 그들의 잘못된 의도가 율법의 참 목적을 잃게 했습니다. 

 

머리는 마음의 종입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머리는 성취하도록 도와줍니다. 마음이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하면 머리는 어떻게 물을 마실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물을 살 것인지, 수도에서 받아서 마실 것인지 등. 율법은 머리 차원입니다. 마음이 사랑이 아닌 다른 것을 바란다면 아무리 좋은 율법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래도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사실은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집에 사로잡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들 생각만이 옳지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아집은 우상입니다. 자아의 생각이 마치 신의 생각처럼 옳다고 믿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옵션도 있음을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의 잘못으로 넘어지게 되었고 머리를 땅에 부딪쳤습니다. 아파 죽겠는데 친구라는 녀석들은 웃고만 있었습니다. 너무 분하고 아파서 마구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모두 놀라서 저를 집 마루에 누이고 빙 둘러서서 괜찮으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잘 됐다 싶어 더 크게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머리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을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 일어섰다가는 엄살 부렸다고 창피를 당할 것 같았습니다. 함께 놀던 제 친형을 비롯한 친구들은 저를 달래는 것도 지쳤는지 울고 있는 저를 혼자 두고 다들 다시 놀러 나가버렸습니다. 아프지 않은데 억지로 우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울음을 그치고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놀자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자니 외로웠습니다. 


아프지도 않은데 우는 아집은 왜 생겼을까요? 아프지 않으면 울음을 거쳐야 함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세상과 단절되어 외로워지는 길뿐입니다. 아집에 사로잡힌 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집에 사로잡히면 행복을 잃음을 알아야 합니다. 행복을 위해 더는 그런 선택을 하지 말아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이단에 빠졌지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한 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한 친구가 이단 종교에 빠져서 많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나중에 그분이 모든 것을 잃고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친구에게 아직도 거기서 말하는 것을 정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대답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믿었고, 지금은 안 믿어. 근데 이젠 쪽팔려서 못 나가.”

 

자신이 가는 길이 나락을 향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체면이나 자존심 때문에 방향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은 적지 않게 있습니다. 아집의 우상에서 벗어나려면 행복을 향한 끊임없는 선택의 연습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조금은 변덕스러워지는 것을 허락해야 합니다. 나의 판단이 항상 옳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지 포먼은 길거리에서 가장 싸움을 잘하는 깡패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고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교만에 무하마드 알리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는 알리와 다시 싸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그를 망가지게 했습니다. 또 다른 패배 직후 죽음직전까지 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는 새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졌는데도 행복할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이겨야만 행복하다고 여겼습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습니다.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고 10년 넘게 쉬었지만, 아이들을 위해 권투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기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행복에 집착합니다. 그러니 자신도 알리처럼 약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알게 됩니다. 결국 45세의 나이에 다시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행복의 변덕쟁이가 됩시다. 한 곳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이 아집입니다. 자아는 변덕쟁이가 되지 말고 한 우물만 파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두 개의 선택 중 하나를 선택하고 어떤 선택이 더 큰 행복으로 이끄는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덜 적게 실패합니다.
https://youtu.be/SK7NjRBFLF0?si=fUTAFmbaKfyyof9d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미사 묵상글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마르 3,5

Jesu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restored. Mk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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