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로, 332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났다. 신심 깊은 그녀는 남편을 개종시키고,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티노의 회개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던 아우구스티노가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된 데에는 어머니 모니카의 남다른 기도와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회개의 길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387년 로마 근처의 오스티아에서 선종하였다. 모니카 성녀는 그리스도교의 훌륭한 어머니의 모범으로서 많은 공경을 받고 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모니카 성녀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학자요 4대 교부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마니교라는 이단에 빠지기도 하였던 성인은 37세에 사제가 되고, 5년 뒤에는 히포의 주교가 됩니다. 이렇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훌륭한 주교이며 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끊임없이 눈물과 인내로 기도한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한 사제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공부가 부족하여 수도 성소를 포기하고 혼인 성소를 선택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는 그에게 “오 남매를 낳아 아들 둘, 딸 둘은 하느님께 봉헌하고 아들 하나는 데리고 사세요.”라고 조언합니다. 그는 혼인하여 아들 셋, 딸 둘을 낳습니다.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 “너희는 신학교, 수녀원에 가거라!” 하고, 장남에게는 “너는 내가 데리고 살 아들”이라며 애지중지 키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장남이 신학교를 가겠다고 합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신학교에 가지 말라는 온갖 설득에도 장남은 신학교로 떠납니다. 입학식 날 어머니는 성모 동산에 올라 6시간을 엉엉 웁니다. 한 달 동안 계속 울며 다니던 어느 날, 다른 사제의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울면 아들한테 안 좋아!”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에 정신을 번쩍 차린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날마다 새벽부터 묵주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장남은 사제품을 받습니다. 아들이 사제품을 받던 날, 어머니는 아들 사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장 아끼는, 가장 좋아하는 것을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내어놓기가 참으로 어려웠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제는 날마다 아침 기도 시간에 자문합니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것을 하느님께 드리고 있는가?”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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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기도: 하느님을 닮는 것과 흉내 내는 것의 차이>
오늘 복음은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다섯 처녀는 등잔의 기름을 간직하였지만 또 다른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때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에게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아실텐데 왜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그리스도를 닮으려던 사람들’이고 ‘미련한 처녀들은 그리스도를 흉내 내려던 사람들’입니다.
나를 닮으려는 사람은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나를 흉내 내는 사람에겐 모욕감을 느낍니다. 적어도 나와 같은 부류는 아니라고 심판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흉내 낸다고 해봅시다. 전에 고등학생들이 ‘관짝 밈’을 올렸을 때 흑인 비하 논란이 일었습니다. 흑인들이 춘 춤을 따라 하기 위해 얼굴도 검게 칠했기 때문입니다.
방송인 ‘샘 오취리’ 씨는 SNS에 그런 인종차별적 행동을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흑인이 한 것이기에 몸도 검게 칠한 것인데 이것이 흑인으로서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취리 씨도 어느 방송에 나와 눈을 찢으며 동양인 비하식의 표정을 지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양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행동입니다.
왜 남의 행동이나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 모욕이 될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변할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등학생들이 흑인이 되고 싶어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흑인을 비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마음이 없으면서 그런 모습을 취했다면 그런 흉내는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을 키워준 부모의 약한 모습을 흉내 냈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더 못 할 짓이 됩니다.
자신을 교통사고에서 구하려다 다리를 다쳐 평생 절뚝이며 살아야 했던 어머니 앞에서 자녀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아이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가 아니라며 부정하고, 어머니의 약해진 다리를 절뚝이며 흉내 내야 할까요? 그러면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질 것입니다.
로보트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를 통해 자신은 학교 선생님인 자기 아버지가 아닌 사업가인 친구 아버지를 닮기로 해서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친아버지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요? 물론 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기쁘기는 하겠지만 아들을 키운 ‘보람’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녀가 자신을 닮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자녀들을 위해 피땀을 흘린 유일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름’이 흉내 내는 것과 닮는 것에서 어떤 차이를 내는 것일까요?
기름은 당신을 닮기를 바라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성령이요, 선물입니다. 사실 흉내만 내고 닮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선물을 받지 않으려 합니다.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타이나 차트랜드와 존 바흐는 이런 실험을 합니다. 우선 두 명씩 짝을 지어 12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서로에게 그 사진을 묘사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실험 참가자의 짝은 실험 조교였습니다. 한 그룹은 실험 조교가 실험자가 하는 행동을 일일이 따라 하였고 다른 그룹은 평소대로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사진 설명이 끝난 후, 대화가 얼마나 순조로웠는지 또 자신의 파트너는 마음에 들었는지를 설문 조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실험 조교가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한 경우 실험 조교에 대한 호감도가 이야기를 들어준 경우보다 더 높았으며, 그만큼 대화도 더 순조로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험 참가자들은 상대방이 자신의 행동을 따라 한 것은 의식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림을 설명해주는 것이 성령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는 자기 뜻을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줍니다. 개에게 밥을 줄 때 그 개가 자신의 말을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양식을 주면서 자신이 바라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선물’에는 ‘닮기를 바라는 뜻’이 들어있고, 그 선물을 받고 자신을 닮아가는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닮으려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성령을 받는 기도를 열심히 할 것입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부모를 계속 닮으려는 사람은 당연히 부모가 차려주는 밥을 열심히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려는 자녀는 부모가 차려준 밥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닮거나 흉내 내려는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오는 ‘양식’인 ‘성령’을 어떤 자세로 받느냐에 의해 구별됩니다.
기도를 싫어하거나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선물을 받아 하느님의 뜻대로 닮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늘 미련한 다섯 처녀가 그런 여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양식’과 같습니다. 양식을 계속 먹으면 그 사랑에 감사해서 그 감사가 그것을 주는 부모를 닮게 만듭니다. 아이들이 두 발로 걷고 말을 하고 심지어 걸음걸이, 말투까지도 부모를 닮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렇기에 계속 부모를 닮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 양식을 꾸준히 받아먹을 것입니다. 만약 밖에서 먹고살다가 정 배가 고플 때만 집에 들어와 밥을 먹는다는 것은 더는 부모를 닮을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통해 맺은 열매를 지니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주시는 양식으로 변화되지 않고 사랑이 아닌 미움, 기쁨이 아닌 우울함, 평화가 아닌 걱정, 절제가 아닌 방탕, 온유함이 아닌 분노, 겸손이 아닌 교만을 지니고 그분 앞에 간다면 주님은 또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창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만큼 고통이 따랐다면 자기가 만들고 싶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보람입니다. 자녀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할 때는 아직 나를 닮게 할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모는 더는 변화시킬 힘을 지니지 못합니다.
흉내내는 것이 되지 않도록 우리 본성을 바꿔주시는 성령님을 꾸준히 모시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현명한 처녀가 되는 길입니다.
규칙적인 기도 습관.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분명히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깨어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 25.13
Stay awake, for you know
neither the day
nor the hour.
Mt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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