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마태오 13,54-58)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202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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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마태오 13,54-58)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2021.7.30.)

by honephil 2021. 7. 30.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54-58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57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우리는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의 정의와는 차이가 있지만, 예언자는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 주는 사람(미리 예: 豫)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맡길 예: 預) 그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그것이 행복임을 주위에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예언자로서 살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과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려고 기도하고 성사 생활을 하며, 이를 추억하고 점차 깊은 관계를 맺어 갑니다. 성경과 교리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방법과 하느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처럼 예언자로서 하느님과 만나고 그분의 뜻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언 직무를 완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언자는 현실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지금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적용하고 설명해야 할지를 정확하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문제들을 바르게 지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의함과 불공정, 인권 침해와 하느님을 섬기지 않는 오만함을 용기 있게 지적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예언자로서 선택이 아닌 의무입니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특히 사제로서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첫 번째 역할만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와 성사 생활만 열심히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제는 예언자로서 세상의 정의와 공정, 평화와 평등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시대에 대한 비판과 쓴소리를 해야 하고,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외면하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시대의 징표를 바라보고, 그 징표를 하느님의 뜻과 가치로 해석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느님의 뜻을 멀리하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바라보는, 그래서 마침내 예수님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나자렛 사람들이며 유다인들입니다. 때로는 고향 사람들이나 친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예.”가 아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예언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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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대신 챙기는 자존심, 그 가치는 얼마일까?>

 

     오늘 복음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여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복음 내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증언하는 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이 말씀대로라면 기적은 믿음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일단 믿고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에게 기적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부터 마음의 문을 닫고 믿어보려고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적이나 해 보라는 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한 번 믿어보려는 열린 마음, 이것이 구원의 첫걸음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믿음’ 대신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존심’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믿었는데 소문대로 예수님께서 사기꾼으로 드러나게 되면 사기꾼을 메시아로 여긴 자신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존심이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까지 감행하며 지키는 것일까요?

 

    어떤 무신론자인 기자가 봉쇄 수도원에 와서 원장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봉쇄 수도원에서 밖에도 못 나가고 고생만 하는 것 같은 수도자들을 안쓰럽게 여기며 원장에서 말했습니다.

 

    “만약 죽었는데 하느님이 없다면 여러분들이 하는 고생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도원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믿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억지로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밖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아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이후에 하느님이 없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 하느님이 계신다면 진짜 놀랄 사람은 당신일 것입니다.”

 

무신론자 기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 고귀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영화 ‘친구’에서 보면 자신이 친구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건달이 건달다워야 한다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무기징역을 선택합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파스칼은 아무리 계산해도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 훨씬 더 이익임을 밝혀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고 사는데도 별 지장이 없지만, 만약 믿는 분이 계실 때는 믿지 않은 사람은 지옥이고 믿은 사람은 천국이 됩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이렇습니다. 한 사람이 차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하도 차가 쌩쌩 다녀서 무단횡단을 하다가는 사고 날 확률이 50%나 됩니다. 그러나 무단횡단을 하면 10초면 끝나지만, 육교로 건너면 10분은 걸립니다. 여러분은 무단횡단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육교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존재하실 확률은 50%입니다. 그러나 지옥 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세우며 믿지 않으려 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일까요? 도대체 우리가 목숨까지 내걸며 지키려는 자존심의 값은 얼마일까요?

 

    항우라는 사나이는 초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7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군을 몰고 오는 한나라의 유방에겐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강에 도착합니다. 배를 준비하고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어서 강을 건너십시오. 강동 땅이 비록 좁다지만, 땅이 사방 천 리나 되며 백성은 수십만입니다. 그곳도 왕 노릇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항우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강동의 8천여 장정들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는데, 지금은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설령 강동의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추대할지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항우의 이런 콧대 높은 자존심은 일생에 단 한 번의 패배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했습니다. 70전 1패의 1패가 그를 죽음으로 몰았고, 유방은 맨날 패하다 이 1승으로 한나라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항우의 오른팔이 ‘한신’이란 장수였습니다. 한신은 가난한 천민 출신이라 지방 불량배 가랑이로 기어 다녀야 했습니다. 물론 실력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지금 살인을 저지르면 그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의 조롱은 대단했습니다. 한때 귀족 출신인 항우에게 갔지만, 천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바람에 유방에게 갔던 것이고 결국 자신이 모셨던 전쟁의 신과 같은 사람이 자결하게 만드는 장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항우의 나이는 31세였습니다.

 

    자존심 내려놓고 일단 한 번 믿어서 속으면 어떻습니까? 왜 자존심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길까요?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생명까지 걸고 지키려는 자존심의 가치는 얼마일까요? 가치는 누가 그것을 알아주고 사줘야 정해지는 것입니다. 금도 너무 흔해서 사주지 않는다면 그냥 돌에 불과합니다.

 

    나의 자존심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에 팔 수 있을까요? 아무도 안 사줍니다. 자존심을 지켰다고 아무도 안 알아줍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자존심은 각자의 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 자아를 귀하게 여겨 사주겠습니까? 혼자만 귀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가진 거지에게 100만 원 수표를 주려고 하는데 그 빵을 놓지 못해서 그 수표를 못 받는 것과 같습니다. 자아가 자존심이 귀한 것으로 믿게 하여 이런 일을 벌이는 것입니다.

 

    저도 어머니와 찜질방에서 누가 늦게 나가는지 시합을 해 보았습니다. 힘든데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 오래 있으려 하는 것은, 주님께 무릎을 꿇느니 지옥을 선택하려는 자세와 같습니다.

 

    자존심을 쓰레기로 여기십시오. 이것이 결국 믿지도 못하게 만들고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자존심이 쓰레기가 될수록 자존감은 더 높아집니다. 그래도 되는 존재가 되게 해주시는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https://youtu.be/0_vup1H8oNA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마태오 13,54-58)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2021.7.30.)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마태 13.57

 

A prophet

is not without honor

except in his native place

and

in his own house.

Mt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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