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코로나 시대에 생긴 ‘살고픔’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지 못하면 배고픔을 느끼듯 사람들을 만나지 못해서 느끼는 ‘살고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 인사 나누고, 서로 안아 주고 눈을 맞추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해 주는 것을 그리워하는 살고픔의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당 소임을 맡지 않고 있는 사제에게도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움과 고민을 공유하고 많은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면서, 같은 것을 보고 살아간다는 기쁨과 위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살고픔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신자들에게 사제는 어려운 사람입니다. 친해지고 싶지만 언제나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존재지요. 그것은 존경의 의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자신의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져 다가가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늘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접근 자체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내 봉사 등 어떠한 계기로 만남이 잦아지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제에 대한 거리감은 점차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주위에도 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고, 그분의 말씀에 힘과 권위가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분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뵐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밭의 가라지에 대한 비유 말씀을 설명해 달라고 거리낌 없이 예수님께 청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 일이 제자들에게는 일상과도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그분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듣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이 묻게 되고 더 자연스러워지고 더 친근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더 가까이에서 만나려고 구약에서 성막을 만든 것처럼, 거룩하신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하늘을 찌를 듯 높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분을 알게 되고 친근해집니다.
예수님에 대한 살고픔을 가지십시오. 늘 그분 가까이에서 그분과 함께 지내십시오.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알아가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최종훈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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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가라지에서 밀이 되는 이유>
오늘은 예수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밀과
지금은 두 자매가 똑같이 맷돌질한다고 하더라도, 두 형제가 똑같이 밭을 간다고 하더라도 둘 중의 하나는 밀이고 둘 중의 하나는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당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어도 한 사람은 밀이고 한 사람은 가라지일 수 있습니다. 겉모양으로는 구분이 안 되는 게 밀과 가라지입니다.
내가 밀인지, 내가 가라지인지 개인적으로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시간에 따른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작년에 밀이었으면 올해도 밀이고, 작년에 가라지였으면 올해도 가라지일 것입니다. 그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작은 밀이었다면 올해는 더 밀이 될 것이고, 작년에 덜 가라지 같았다면 올해는 더 가라지 같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더 그리스도답게, 그렇지 않은 가라지는 예수님의 모습과 더 상반되게 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라지를 말씀하시는데,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가라지는 ‘남을 죄짓게 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자’입니다. 물론 밀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 볼 때, 올해 덜 죄를 짓는 사람은 밀이고 더 죄를 짓는 사람은 가라지입니다.
그렇다면 가라지에서 밀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성령의 씨앗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만 있게 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아무리 많은 죄를 짓고 있어도 가라지에서 밀로 돌아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변해가는데 자신이 가라지처럼 변하는지, 밀처럼 변하는지 그 기준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기준은 하느님을 똑같이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015년 미국 마이애미의 한 재판장. 판사 ‘민디 글레이저’는 범죄자 ‘아서 부스’를 재판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절도 및 도주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을 보고 판사는 느닷없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고인의 이름과 얼굴을 확인한 판사는 재판과 상관없는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혹시 노틸러스 중학교에 다니셨나요?”
그러자 피고인은 “오, 세상에!”를 연발하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피고인도 판사가 중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노틸러스 중학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명문 학교입니다. 둘은 이곳에서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입니다. 절친했던 둘은 모두 우수한 성적을 보이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언어 과목에 강점을 보였던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기를 꿈꿨고 수학과 과학을 잘했던 아서 부스는 신경외과 의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7살이 되어 아서 부스는 도박과 마약에 빠졌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였고 급기야 남의 돈에 손을 대며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아서 부스가 징역형을 선고받은 해에 민디 글레이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쿨에 입학하였습니다.
10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32세에 취직 준비를 시작한 아서 부스는 범죄자를 받아 주는 직장은 찾을 수 없었고 다시 마약에 중독되어 도박에 손을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시기 민디 글레이저는 판사가 되었고 아서는 얼마 안 가 또다시 절도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만에 같은 중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출발한 둘은 판사와 피고인으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민디 글레이저는 말합니다.
“항상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습니다. 중학교 때 정말 좋은 아이였습니다.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도 자주 했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거기서 뵙게 되어 정말 유감입니다. 아서 부스 씨, 앞으로 당신이 스스로 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슬픈 건 우리가 벌써 이만큼 늙었다는 거죠. 진심으로 행운을 빌게요.”
이후 아서는 보석금 4,800만 원의 판결을 받고 10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했습니다. 그리고 민디 글레이저 판사는 직접 마중을 나와 친구의 새 출발을 응원해줬습니다.
아서 부스는 말합니다.
“판사가 된 친구와의 만남은 제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어요. 앞으로는 성실히 약물치료도 받고 똑바로 살아가겠습니다. 이제는 자포자기가 아닌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 볼게요.”
재판을 받을 때 아서 부스는 거의 오열하다시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였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자신의 비교 대상을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비교할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교해야 할 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나의 삶을 비교하려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형제임을 믿어야 합니다. 민디 글레이저 판사와 아서 부스가 같은 학교에서 같은 우등생이 아니었다면 아서 부스가 그렇게 살아온 세월을 보며 오열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함께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면 그분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같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차피 출발점이 다르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밀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가라지가 밀이 될까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부터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비교 대상이 됩니다. 그러면 더는 그분의 모범과 멀어질 수가 없기에 가라지가 되는 일은 없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43
The righteous
will shine
like the sun
in the kingdom
of their Father.
Mt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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