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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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20.4.1.)

by honephil 2020. 4. 1.

[묵상]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20.4.1.)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묵상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주신 말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 8,31-42)

어느 시인은 4월을 ‘기적이 일어나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살아나는 시간이기에 그렇답니다. 제발, 그런 4월이 되기를. 그런데 4월 1일을 만우절(萬愚節)이라고 부릅니다. 뭐랄까요, 가벼운 거짓말로 재미를 돋구는 그런 날이랄까요. 악용하면 안되겠지만 가까운 사이끼리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이날의 기원은 예전 역법으로 새해를 3월 25일에 시작하고 그 날부터 4월 1일까지 춘분제를 지내고, 춘분제 마지막 날에 선물을 교환하던 풍습에서 유래한답니다. 프랑스에서는 1564년에 샤를 9세가 새로운 역법을 채택, 신년을 4월 1일로 개정했을 때 이를 아직 알지 못한 이들이 여전히 4월 1일을 춘분제 마지막 날로 생각하고 그 날 선물을 교환하거나 신년 잔치 흉내를 장난스럽게 내기도 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답니다.
또 동양 기원설도 있는데 인도에서는 춘분에 불교의 설법이 행해져 3월 31일에 끝이 났으나 신자들은 그 수행 기간이 지나면 수행의 보람도 없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3월 31일을 야유절(揶揄節)로 불러 남에게 할 일도 없이 심부름을 보내는 등 장난을 쳐서 재미있어 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적 기원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4월 초에 대사제 한나스로부터 카야파에게, 또 카야파에서 빌라도에게, 카아퍄로부터 빌라도에게, 빌라도로부터 헤로데에게, 헤로데에게서 다시 빌라도에게로 끌려다니신 수난기를 기념하여 남을 헛걸음시키는 풍습에서 비롯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장난으로 거짓말하고 속아 넘어가고 하는 것이 재미로 인정되는 날이죠. 너무 심하지 않은 유쾌한 거짓말이 활력소가 되기도 해요. 허위신고 같이 물의를 일으키는 것 아니라면 슬쩍 넘어가주면 괜찮지 않을까요. 수위 조절 잘하면서요. 그런데 만우절이니까 안 속아넘어갈래,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것은 좋은데 한편 믿어야 할 것을 못믿어 낭패가 오는 경우도 있어요. 또 거짓인줄 알면서 또 일부러 속는 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리)과 거짓, 그 간극에서 우리는 늘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진리입니다. 거짓과 대치되는 하느님의 진리에 대한 말씀이죠. 하여 더 생생한 것 같죠. 만우절에 듣는 진리에 관한 말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로 인해 자유롭게 되리라는 약속을 듣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가 가고 싶어하던 신촌 연세 대학교 교훈입니다. 또 세계를 감시하는 미국 정보부 CIA 의 모토이기도 합니다. 자유를 주는 진리, 그런데 이 진리에 대해 각자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학문적 진리 추구로 생각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정보수집을 통해 권력 기반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진리라고 파악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 명확하게 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진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 ‘진리가 무엇이냐?’ 요한 18장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었던 내용이죠.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당신이 진리이시니까 대답 안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로 나가는 진리의 통로, 진리 자체가 당신이시라는 것이죠.
오늘도 그런 취지의 말씀을 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아들인 당신이야말로 진리라는 것, 우리가 알아야 할 바로 진리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 우리가 바르게 알고 믿어야할 분임을 명백히 하셨습니다.

거짓은 우리에게 실상을 가리는 것이죠. 반면 진리는 실상을 알려주는 것이죠. 실상을 알게 되면 묶이지 않는 자유의 경지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어떻게 얻는가?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유로워야 진리에 이르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해서 우리가 영적이고 근본적인 자유,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그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데 거꾸로 그 진리에 이르는 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만, 동시에 자유가 우리를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죠. 억압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학문 영역에서는 자유롭게 논쟁하고 의견을 교환해야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죠. 강요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래 자유롭다는 것은 좀 시끄러운 거에요. 혼란스럽게 보일 수도 있죠. 그런데 자유의 부작용이 너무 심해, 그러니 자유를 제한해야겠어 - 그러면 안된다는 것이죠. 기강이 헤이해졌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에요. 어쩌면 그 시끄러움이 바로 자유의 본질입니다.  전체주의국가는 어떻습니까? 겉보기에는 평온해요. 그런데 위장된 평화죠. 억압으로 강제된 평화죠. 거짓된 것입니다. 일사분란하지만 자발적이지 않고 공포에 근거한 것이죠.
그러니 역설적으로 시끄러움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저런 논란이 있습니다. 이 방도 좀 시끄럽죠. 괜찮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기에 좀 시끄럽기도 하고 맘 상하기도 하고 내 생각과 다른 말도 듣게 되기도 하고 그렇죠. 그럼 우리가 자유로움을 통해 진리로 한걸음 나아가고 있구나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우리는 진리로 자유롭게 되고 자유를 통해 진리로 나갈 수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는 4월 되십시오.    

남 라파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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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가해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나에게 인정받는 이의 말만이 나를 변화시킨다> 
 
복음: 요한 8,31-42

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는 큰 포목상을 경영해서 돈을 많이 번 부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의 사업을 훌륭하게 이어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방탕하게 지내던 프란치스코의 삶은 허물어져 가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하느님을 만나고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도하고 주님의 뜻만을 찾았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 집 안에 있던 옷감과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아씨시 주교에게 아들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요구합니다.
“이제 이놈은 나의 아들이 아니니 호적에서 이놈의 이름을 제거해 주시오!”
여러모로 둘의 관계를 화해시켜보려던 주교도 결국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제 프란치스코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러자 프란치스코는 옷을 벗어 아버지에게 주며 “이것 받으세요. 앞으로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를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교가 자신의 망토를 벗어 프란치스코에게 입혀주었습니다. 이때부터 프란치스코는 지상 아버지의 뜻에서 자유로워지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게 됩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아버지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겠습니까? 바로 ‘죄’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하십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이 곧 진리이기에 그 가르침을 따르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해방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계속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이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시기에 만약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아버지라 여기면 그 말씀은 힘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친아버지의 말씀을 따르지, 모르는 아저씨의 말을 따르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유다인들은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라고 반박합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니, 그들은 실제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참 아버지로 여기면서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사형수가 죽기 전에 어머니를 꼭 한번 면회하게 해달라고 간청해서 면회를 시켜주었더니 창살 안에서 어머니를 가까이 오라고 해서는 코를 물어뜯더랍니다. 그 이유는 “왜 내가 어려서 남의 것을 훔쳐 오고 나쁜 짓을 할 때 못 하게 말리지 않아서 내가 오늘날 큰 죄를 범하고 사형을 당하게 했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잘못 나갈 때는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이들이 부모를 부모로 인정할 때야만 가능합니다. 사춘기가 넘어가면 아이들은 부모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부모가 하는 말들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말은 말을 하는 사람을 인정할 때야만 그 사람 안에서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오기 이전에 꼭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참 아버지요, 성모 마리아를 참 어머니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방법은 그분들의 사랑을 깨닫게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랑으로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그분의 말씀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부모에게도 효도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방식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0 가해 사순 제5주간 수요일

https://youtu.be/ZYq02dN0vA0

 

 

 

코로나 19 극복을 청하는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    

'코로나 19' 확산으로 혼란과 불안 속에 있는    
저희와 함께 하여 주십시오.    

어려움 속에서도 내적 평화를 잃지 않고    
기도하도록 지켜주시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십시오.    

'코로나 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내려주시고,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는    
의료진들과 가족들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또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의 영혼을 받아주시고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국가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더 해주시고,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투신하고 있는 관계자들을     
보호해주십시오.    

특별히 이런 상황에서 더 큰    
위험에 노출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저희가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자    
애쓰는 저희 모두가    
생명과 이웃의 존엄,    
사랑과 연대의 중요성을    
더 깊이 깨닫게 하시고    
배려와 돌봄으로    
희망을 나누는 공동체로    
거듭나는 은총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님과 함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코로나 19 극복 기도   



[ 코로나 19 종식을 위한 9일 기도 ]  

8일차(수) - 영광의 신비 
1일차(수) - 영광의 신비,  2일차(목) - 빛의 신비, 3일차(금) 고통의 신비 
4일차(토) - 환희의 신비, 5일차(일) - 영광의 신비 
6일차(월) - 환희의 신비,  7일차(화) - 고통의 신비, 8일차(수) 영광의 신비 
9일차(목) - 빛의 신비

 

https://youtu.be/AbuuoSiz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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