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1-8) -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2021.5.2.)
본문 바로가기
영성의 샘

[묵상]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1-8) -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2021.5.2.)

by honephil 2021. 5. 2.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뜻이 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6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 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신우식 토마스 신부


~~~~~~~~~~~~~~~

 

<지나친 기도 지향의 위험성 : 기도의 맛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오늘 복음도 성 목요일 만찬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뤄내려는 시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께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    우리는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유일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만약 기도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마음이 자라남을 느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오래 다닐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에서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기도의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도의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맛은 기도 안에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바랄때 잃게 됩니다.

 

    마치 과자를 먹을 때 단 맛을 원했는데, 짭짤한 맛이었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짭짤한 것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맛과 다를 때 그 과자가 싫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짧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듯,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지향’입니다.

 

​    기도지향은 자칫 기도의 목적을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나 기도 때 지향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 기도가 들어지면 이제 행복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블랙홀과 같아서 주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저를 떠나갑니다. 많이 들어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요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떠한 지향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만두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청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제 상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호구로 여기게 됩니다.

 

처음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어도 그 욕구는 블랙홀이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구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오히려 상대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여문의’라는 공정하고 청렴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 재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 재상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에 자비를 베푸는 바람에 그가 더 나쁜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도 한없이 요구하는 이에게 한없이 베푸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참맛을 회복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 엄청난 기도지향을 읊는 사람을 보면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 수많은 미사 지향을 보며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미사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히면 나머지는 굳이 청하지 않아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사 지향이나 기도 지향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잃고 맙니다. 그러면 청원도 이뤄지지 않고 기도의 맛도 잃어 결국엔 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는 잘못된 지향으로 예수님께 붙어있었습니다. 의도가 깨끗하지 못하니 그 가지를 통해서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지향이 여전히 돈과 명예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다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청하십시오. 그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기도 때는 제발 지향을 잊어버리십시오. 오히려 기도 중에는 자신이 청하는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십시오. 더는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되기를 청하십시오.
 

    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https://youtu.be/BSUq-HMvV1o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1-8) - 부활 제5주일 (생명 주일, 2021.5.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