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
사제품을 앞둔 어느 날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사제로 살 수 있을까? 제의를 입은 채 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면 할수록 자신은 더 없어지고 두려움만 점점 커져 갔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저의 첫 질문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가’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을 찾았는가? 그 말씀을 외우고 되새기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가?
그렇게 성경을 다시 읽어 나가다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병자들의 치유와 빵의 기적을 옆에서 직접 보았음에도 큰 파도에, 또 그 어둠 속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고 소리 지르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많이 만나 주셨는데도 ‘사제품’이라는 큰 관문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네가 울부짖을 때마다, 네가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마다 만나주었던 나다. 나는 살아 있는 하느님이고, 나는 너를 사랑하는 하느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 이 말씀이 마음속에서 울리는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고, 가끔 스멀스멀 그 두려움이 피어올라 올 때면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묵상하던 가운데 ‘그렇구나.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려 노력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가려는 곳, 하느님 품 안에 가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어느덧 사제로 산 지 26년이 되어 갑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시간이 가겠지요.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려고 노력만 한다면 말입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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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있는 만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관점의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의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과정은 공관복음과 비교하면 매우 짧게 묘사됩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을 배에 받아들이는 과정을 ‘성체성사’와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성체성사를 설명하는 내용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5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이스라엘을 먹인 것과 다를 바가 없기에 역시 성체성사의 예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도 이 내용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입니다. 바로 ‘두려움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하시고,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였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 각자는 세상이란 바다의 풍랑에 휘둘리며 걱정과 근심으로 살아가는 한 척의 배와 같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며 세상을 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모셔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무언가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건강과 자녀, 재물 등을 잃을 것을 걱정하는 것이 두려움인데, 그리스도는 사랑 자체이십니다. 사랑은 십자가를 지게 만들어 나를 온전히 내어주게 합니다. 따라서 내 안에 내가 있으면 사랑은 그만큼 없는 것입니다. 성체를 영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모셨다면 당연히 내가 죽었으니 두려움을 느낄 대상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은 나와 내가 소유했다고 믿는 것을 잃기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사랑은 적극적으로 나를 잊고 남을 위해 바치게 합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들어왔는데 동시에 두려움을 느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윤발은 1955년 홍콩 라마섬의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처절한 가난을 겪으며 유년 시절을 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무와 고구마를 먹으며 중학교를 중퇴하고 상점 직원과 집배원 등의 일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갑니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연극을 시작하고 연기 생활에 접어듭니다. 워낙 철저한 자기관리와 성실함이 있었기에 그는 점차 감독들의 시선을 받게 됩니다. 1980년 ‘상해탄’이란 영화로 인기를 얻게 된 그는 그때부터 신문에서 우연히 본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선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 기사를 보고 감명을 받은 오우삼 감독은 그를 캐스팅하여 영화를 찍는데 그것이 바로 주윤발의 인생 최고작 ‘영웅본색’입니다. 오우삼 감독은 주윤발이 영화 속 인물보다 더 의리가 넘치는 인간이었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래에 8,100억 원의 전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홍콩 반환 반대 시위에 동조하는 의미로 나라에서 금지한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위 현장에 나타나서 중국 TV나 영화 출연을 금지당하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는 검소한 주윤발은 “괜찮습니다. 돈을 좀 적게 벌면 되죠.”라며 웃어넘겼습니다.
최근 태권도와 김치의 종주국이 중국이라는 논란이 일자 그는 자신이 8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했을 때 김포공항에서부터 김치 냄새가 났습니다. 밖으로 나가니 온 동네 아이들이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논란에 대해 저는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처럼 공항에서 김치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거리에서는 태권도복을 입은 학생들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의 두려움 없는 행보는 인간관계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얼마 전 간암으로 70세에 사망한 유명 배우 ‘오맹달’과의 사연입니다.
오맹달은 왕년에 술과 여자,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끝에 거액의 도박 빚까지 지는 바람에 중국의 최대 조직인 삼합회의 협박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오맹달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친한 주윤발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주윤발은 평소 의리남 행보와는 다르게 네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해결하라며 차갑게 단칼로 오맹달의 부탁을 거절해버렸습니다.
이미 부와 명성을 크게 쌓은 주윤발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오맹달은 주윤발이 1원 한 푼 주지 않자 그때부터 크게 원망하기 시작하며 분노심을 원동력 삼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본업에 매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영화계에서 오맹달은 술과 도박에 빠져 자기 관리가 안 되는 문제아라고 찍혀버리는 바람에 그의 바람만큼 복귀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실낱같은 희망으로 간신히 영화 ‘천장지구’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그는 인생 연기를 펼치며 그해 홍콩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타내는 쾌거를 거두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오맹달은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주윤발을 시상식에서 마주치자 아직 앙심이 풀리지 않아 주윤발의 축하 인사마저 냉랭하게 무시했고 이후로도 주윤발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을 계속 주위 사람들에게 비췄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맹달을 구해준 작품인 천장지구의 진목승 감독이 술자리에서 오맹달을 부르며 그가 몰랐던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맹달씨, 나는 사실 당신을 캐스팅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 또한 당신이 도박과 술에 빠진 망한 배우라는 소문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그대를 내게 적극적으로 추천했습니다. 당신의 친구 주윤발이 우리 영화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내게 사실 부탁이 아니라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고요. 그리고 주윤발은 당신에게 미움받을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신은 당신을 캐스팅한 내게 고마워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 주윤발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고맙다고 말하세요.”
이 얘기를 듣자마자 오맹달은 그 길로 눈물을 흘리며 찾아가 사과를 했고 주윤발의 인성과 큰 그릇에 다시 한번 감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주윤발 마침내 태권도와 김치 중국 논란에 대해 입을 열다’, 유튜브 채널 ‘비지이지TV’]
만약 주윤발 씨에게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비난받기 싫어 돈을 얼마 주었다면 오맹달은 재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만큼 자아가 죽었기 때문에 돈과 명예, 심지어 우정까지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주윤발 씨 안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윤발 씨와 다르게 그리스도를 성체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지는 게 두렵고, 미움받고 멸시받는 게 두렵고, 조금 고통받는 게 두렵다면 그만큼 그리스도를 모신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 하면,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이미 두려움의 바다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두려움입니다. 자아에게 말입니다. 그러니 그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다른 두려움은 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을 위험에 있는데 아이 시험 성적 떨어지는 게 두렵겠습니까? 성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오시는 그분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사랑이 들어오시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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