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주일 (202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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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묵상]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주일 (2021.4.11.)

by honephil 2021. 4. 1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며,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린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오늘의 묵상||||||||||||||||||||||||


진나라 환온이 촉을 정벌하려고 군사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양쯔강의 삼협이라는 곳을 지났습니다. 그곳을 지나면서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 왔는데, 그 어미 원숭이가 환온이 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슬피 울며 뒤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배를 강기슭에 대자 어미 원숭이가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지만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답니다. 병사들이 하도 이상하여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토록 창자가 끊어질 만큼 자식을 잃은 슬픔이 컸던 것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자비’는 ‘크게 사랑하고 가엾게 여김’으로, 성경에서는 ‘가엾이 여기다’로 자주 표현됩니다. ‘가엾이 여기다’는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인데, 오장육부, 곧 창자 등을 뜻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애끊는 마음’, ‘단장의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자비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살피는 사마리아인의 마음입니다(루카 10,33 참조). 또 되찾은 아들의 이야기에서, 유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굶어 죽게 되어 힘없이 돌아오는 작은아들을 멀리서 발견하고는 한숨에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추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루카 15,20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행동, 당신의 온 인격으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십니다. …… 자비는 하느님과 사람을 이어 주는 길이 되어 우리가 죄인임에도 영원히 사랑받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줍니다. …… 우리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 용서하고 자신을 내어 주라고 요청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서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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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언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주십니다. 당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는데, 또 제자들이 그러한 권한을 행사하러 다닌다면 이는 분명 목숨에 위협이 되는 행위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고 다녔다면 이는 분명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음을 보여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없었기 때문에 감히 죄를 용서해주는 사도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지 못한 것이 동시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갖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하나가 되어 여드레 뒤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된 이후로는 따로 그러한 권한을 받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믿게 됩니다.

 

​    따라서 교회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것만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이는 비단 교회 전체에 해당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과 자비를 베풂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그 황송함과 기쁨에 놓아주고 용서합니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그 용서하는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발견합니다. 용서가 쉽지 않다는 것을 모두가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에서도 이러한 용서의 모범은 수없이 많지만, 개신교 한 집사님도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소개해 드립니다.

 

    “우리 교회 이모 집사님은 직장 전도훈련(BBS)을 열심히 합니다. 그 BBS 동료인 A라고 하는 어느 집사님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A집사님은 어느 날, 직장 회식 자리에서, 자꾸 권하는 술을 그리스도인의 양심으로 계속 거절하다 급기야 화가 난 직장 상급자에게 뺨을 맞게 되었습니다. 처자식이 있고, 연배가 있는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창피하고, 분하겠습니까?

 

    집에 와서 며칠 동안 회사도 무단결근하며 분을 삭이다가, 결국 회사를 그만두려 결심하고 사표를 내기 전, 산으로 올라가서 기도드렸습니다.

 

​    뺨 맞은 서러운 생각, 분한 마음, 막상 직장을 그만두려니 막막한 두려움 등으로 간절히 하느님께 호소하셨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중 뜻밖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겨우 뺨 한 대 맞은 것으로 그렇게 분해하고 억울해하느냐? 나는 모든 이에게 멸시 천대와 고난을 받았고, 너를 위해 십자가를 지었다.’

 

    침 뱉음을 당하고, 저주와 욕설, 살을 찢는 채찍으로 맞으시면서 아무런 자존심도 혈기도 변명도 없이 묵묵히 당신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길을 오르셨던 우리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조롱하던 그 무리를 저주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그 예수님의 음성이 아닙니까? 뺨 한 대 맞은 것을 어찌 고난이라고 분해하고, 직장까지 그만두려 했을까?

 

    A집사님은 그 신비한 음성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고 눈물로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산에서 내려와서 다음날 직장에 출근하였습니다. 며칠 간 무단결근 후에 출근 한 회사에서는 그동안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의 뺨을 때린 상급자가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하여 징계를 받을 처지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 상급자가 회사에서 처리했던 여러 일이 문제가 되었고 그중에 A집사님의 뺨을 때린 사건도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A집사님은 자신의 뺨을 때린 그분을 두둔하며, 그분의 구명을 위해 힘썼습니다. 피해 당사자인 A집사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분을 도우니 결국 회사에서 내리려던 징계도 잘 해결되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그 상급자는 A집사님의 ‘이해하지 못할’ 관용과 사랑에 감동하여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지금은 직장 선교회의 한 지부의 leader(지도자)가 되어 열심히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뺨을 때렸던 바로 그 사람이 말입니다."

 

[출처: ‘뺨 맞고 용서하신 집사님’, 다음 카페, ‘주님 오실 때까지’]

 

    비록 개신교 신자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현실과 매우 밀접하여 예화로 선택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이러한 크고 작은 용서해야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 상처에서 나오는 성령을 주시며 용서하라고 교회를 파견하십니다. 그 용서의 힘이 전교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음에 미움을 담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직접 우리 안에 모시기 때문입니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내가 너를 용서하기 위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미워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분께서 나를 위해 참아주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나에게 그만큼 고통을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이 힘이 모이면 교회에 더 많은 신자가 모이는 선교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용서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https://youtu.be/6Z4l06rrbJo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요한 20,19-31) -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주일 (2021.4.11.)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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